이 화백이 지난 10년간 제주에서 작업한 작품들을 서울 한복판에서 펼쳐 보인다. 오는 20일까지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삶’을 주제로 열리는 개인전을 통해서다. 흑백톤의 해녀와 밭일하는 여성, 이국적인 풍경화 등 제주의 민낯을 붙잡은 작품 30여 점을 걸었다. 작가는 “제주에서 제2막 미술인생을 열며 보고 느낀 것들을 전하는 자리”라며 “한국 여성에 대한 경외감과 존경심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중앙대 미대를 졸업한 이 화백은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시각적인 조형언어로 번역해 전파하는 ‘무언(無言)의 환쟁이’로 불린다. 1982년 ‘임술년’ 동인을 결성해 6년여에 걸쳐 황재형, 이종구, 송창 등과 함께 불우한 시대에 대한 미술적 모색을 주도하며 역사와 현실을 차지게 화폭에 품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사진처럼 섬세한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광부, 뱃사공, 농민들의 고단한 삶을 살폈다.
이 화백은 그동안 잊히지 말아야 할 역사와 사람의 기억을 무던히 좇았다. 제주 여성들을 소재로 시대적 풍경을 은유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작가는 70~80대 여성들의 생생한 얼굴을 전시장 맨 앞자리에 배치했다. 해녀복을 입고 물질을 위해 바다에 뛰어들거나, 콩을 털거나, 밭을 가는 등 무언가 ‘건강한 노동’에 매달려 있는 모습들이다. 200㎝가 넘는 화폭에 그린 해녀 얼굴에 깊게 파인 주름이 사진처럼 선명하다. 얼굴을 클로즈업한 초상화에도 잔주름이 가득하지만 눈가의 미소는 삶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는다.
이 화백은 “삶과 노동의 현장에서 직접 만난 여성들의 모습을 통해 수면 아래 감춰진 제주의 과거를 캔버스에 흡수시키고, 자연과 세월의 풍파를 이겨낸 한국 여성의 강인함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제주의 풍경화들은 아름답게, 때로는 쓸쓸하게 다가온다. 풍경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적색, 녹색, 청색 등 단색으로 응축했다. 밀가루 반죽하듯 유연하고 감각적으로 버무렸다. 폭이 3m에 이르는 녹색의 ‘4월의 숲’은 제주의 시선을 녹여낸 삶의 용광로처럼 보인다. 작가는 “제주와 인간의 따뜻함이 그립다”며 “앞으로 살아갈 기적을 꿈꾸며 제주의 역사와 공간 환경을 소설 쓰듯 들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