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루스벨트가 가르쳐준 '공감리더십'
미국인들이 마흔다섯 명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존경하는 인물 세 번째로 꼽는 사람이 프랭클린 루스벨트(1933~1945년 재임)다. 1등은 ‘국부’로 추앙받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2등은 흑인노예 제도를 폐지한 에이브러햄 링컨이다.

루스벨트가 두 거인과 함께 ‘빅3’ 반열에 오른 데는 이유가 있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통틀어 최고의 공감 능력을 발휘한 지도자로 평가받는 덕분이다.

그의 ‘공감리더십’은 미국 전역을 덮친 경제대공황의 거대한 혼란과 불안, 불신의 소용돌이 속에서 탄생했다. 1933년 3월 5일, 루스벨트는 대통령에 취임한 첫날 첫 업무지시로 전국 모든 은행에 나흘간 휴업명령을 발동했다. “곧 경제가 거덜날 것”이라는 공포가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전국 곳곳에서 발생한 ‘뱅크런(bank run: 사람들이 한꺼번에 은행에 몰려들어 예금을 인출하는 현상)’을 수습하기 위한 비상조치였다. 이 조치로 은행들의 대규모 파산 위기는 한고비 넘겼지만, 급한 불을 끈 정도였다. 시민들 마음속에 똬리 튼 공포와 경제 상황에 대한 불신을 없앨 근본 처방이 필요했다.

루스벨트가 선택한 건 라디오 담화였다. 전국에 생중계된 저녁 방송을 통해 은행이 돌아가는 원리를 차분하게 설명하고는 “대통령을 믿고 은행에 돈을 맡겨 달라”고 호소했다. 거실에 둘러앉은 가족들에게 아버지가 도란도란 얘기를 들려주는 듯 친근한 전달 방식은 ‘노변담화(fire chats)’라는 애칭이 붙을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그리고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은행 거래를 재개하는 시민이 늘어나면서 3월 말에는 전국 은행의 75%가 영업을 재개했다.

루스벨트의 ‘노변담화’는 대공황을 물리쳐낸 리더십의 일부일 뿐이다. 역사학자인 제러미 수리 텍사스오스틴대 교수는 루스벨트가 곤두박질치던 경제를 일으켜 세우고 갈가리 찢긴 민심을 추스르는 데 성공한 요인으로 두 가지를 꼽는다. 언제까지 무엇을 해내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고, 머잖아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의 ‘희망고문’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루스벨트는 나쁜 상황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지 않았고, 누구를 탓하지도 않았으며, 복잡한 상황을 함부로 단순화하지도 않았다(did not sugarcoat, condemn or oversimplify).”(워싱턴포스트, ‘대통령의 공감능력은 어떻게 정치를 향상시키는가’)

정치학자들이 주목하는 루스벨트 리더십의 특징은 “능력 있는 구세주가 아니라 공감을 통해 국민 스스로 행동하게 하는 조력자(助力者) 역할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그의 전임자였던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이 대목에서 달랐다. 대공황 초기 국정을 맡은 후버도 국민 설득을 위해 라디오 담화를 동원한 적이 있지만 싸늘한 반응에 부딪혀 금세 접고 말았다. 훈계하듯 꾸짖고 가르치려 드는 연설 내용에 국민이 귀를 막은 것이다. 민주당원이었던 루스벨트는 ‘공감리더십’ 덕분에 소속 정당에 엄청난 선물을 안겼다. 그때까지 ‘노예해방의 아버지’ 링컨의 소속 정당인 공화당을 지지했던 흑인들이 민주당 쪽으로 돌아서기 시작한 것이다.

‘공감리더십’은 문재인 대통령이 강조해 온 것이기도 하다. 취임 초 해외를 순방하는 비행기 안에서 정신과 의사의 책을 읽고는 “공감과 소통이 정치의 기본이라고 늘 생각해왔지만, 내가 생각했던 공감이 얼마나 얕고 관념적이었는지 새삼 느꼈다”는 독후감을 SNS에 띄우기까지 했다. 그런 문 대통령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다루는 과정에서 ‘공감불능’을 드러내 비판받고 있다. 코로나 사태 초반에 “머지않아 코로나19가 종식될 것”이라고 성급하게 예단하더니, 급속 확산이 시작된 날 청와대에서 ‘고기 짜파구리 파티’를 벌이며 파안대소하는 사진을 보도자료로 내놓아 많은 국민을 허탈하게 했다. 그의 장관들도 “메르스 때보다 잘하고 있다” “한국의 방역 역량이 우수하다” 등의 신중치 못한 말로 코로나 장기화에 지친 국민의 울화통을 자극하고 있다.

지도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도 같은 무게를 지닌다. 루스벨트는 후배 정치인들에게 이런 교훈을 남겼다. “격변기일수록 정부는 국민 각자의 역량을 끄집어내고 연결해서 스스로 나서게 해야 한다. 정부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공감리더십은 그래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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