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보건기구(WHO)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가 아시아를 넘어 미국과 유럽 등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되는 과정에서도 세계적 대유행(팬데믹) 선포를 주저해 왔다. 전 세계 110여개국에서 확진자 수가 12만명을 넘고, 사망자가 4300여명에 달하는 상황에서 WHO가 늑장대응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WHO가 팬데믹을 선포했어도 당장 각국에 대한 WHO의 권고사항 등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팬데믹 선포에 따라 뒤따르는 법적 조치도 없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사진)은 11일(현지시간) 기자회견에서 팬데믹은 용어적인(colloquial) 의미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WHO는 팬데믹 선포에 따른 구체적인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코로나19의 발병 위협이 최고조에 달해 각국 정부가 더 강력한 대응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의미라는 것이 WHO의 설명이다. 테워드로스 사무총장은 “지구촌 공동체를 향해 감염병 통제 노력을 배가하고 확산을 막을 공격적인 조처를 취해달라”고 원론적인 입장만 밝혔다.

WHO는 이미 코로나19에 대해 지난 1월30일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PHEIC)를 선언했다. 국제비상사태가 선포되면 발원지를 비롯해 위험 지역 여행과 교역, 국경 이동 등이 제한될 수 있다. 또 WHO를 비롯한 국제의료기관들의 재원과 인력이 바이러스 차단과 백신 개발에 집중 투입된다. WHO의 국제보건 규정은 국제법상 조약으로 190여개 회원국에 국내법(법률)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 다만 처벌·강제 규정이 없어 현실적으로는 권고 수준의 효과에 불과하다. 더욱이 WHO는 지난 1월 국제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중국 등에 대한 이동제한을 권고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WHO가 코로나19에 대한 명확한 팬데믹 기준이나 규정을 세우지 않으면서 ‘늑장대응’이라는 비판과 혼란을 자초했다고 보고 있다. WHO엔 코로나19에 대한 팬데믹 기준이나 규정은 없다. 다만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HINI)가 발병했을 당시 설정한 6단계 경보기준만 있을 뿐이다.

당시 WHO는 감염병 위험 수준에 따라 1~6단계의 경보 단계를 설정했다. 이 중 4단계가 사람 간 전염을 통해 지역사회 감염이 대규모로 확산되는 에피데믹이다. 5~6단계는 전염병 위험 최고단계로, 전 세계로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팬데믹이다. 특정 대륙을 넘어 다른 대륙으로 바이러스가 대규모로 확산되는지 여부가 팬데믹을 선포하는 핵심 기준이었다.

이 기준대로라면 중국 등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코로나19가 퍼졌던 지난달 중순엔 팬데믹이 선포됐어야 했다. 하지만 WHO는 6단계로 구성됐던 인플루엔자에 대한 팬데믹 기준을 더이상 활용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전 세계 전문가들과 언론들 사이에서 이 6단계 기준이 여전히 활용되면서 팬데믹 선포를 놓고 괴리만 깊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WHO 팬데믹 선포를 계기로 전 세계 각국이 확진자가 많은 주요 국가에 대한 입국제한을 더욱 강화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중국과 이탈리아처럼 확진자가 다수 발생하는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 대상으로 이동금지 조치를 내리는 국가도 잇따를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런던=강경민 특파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