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제안 개헌안, 압도적 지지로 의회 심의 통과…내달 22일 국민투표
"2024년 이후 집권 연장 시도" vs "재출마 아직 결정안해, 선택지 넓힌 것"

최근 러시아 정계의 최대 화두는 헌법 개정이다.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가 폭락 문제 등도 큰 관심사이긴 하지만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 지도부의 관심은 개헌에 더 쏠려 있는 듯하다.

개헌 이슈에 갑작스레 불을 붙인 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다.

푸틴 대통령은 앞서 지난 1월 중순 연례 국정연설에서 전격적으로 개헌을 제안하며, 논의가 필요한 7가지 개헌 항목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제안은 전격적이었으나 구상은 숙고 끝에 나온 것처럼 보였다.

그가 제안한 개헌안에는 두 차례만 재직할 수 있도록 하는 대통령 임기 제한, 상·하원을 포함한 의회 권한 강화, 지방 정부 수장(주지사 등)들이 모인 대통령 자문기구인 '국가평의회' 권한 강화, 국제협정에 대한 국내법 우위 인정 등의 내용이 담겼다.

이후 푸틴 대통령의 박차로 개헌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다.

각계 전문가들이 참여한 개헌 준비 실무그룹이 마련한 개헌안은 지난 11일 하원과 상원의 심의 절차를 압도적 지지로 통과했다.

며칠 내에 지방 의회 심의와 헌법재판소 심사를 거치면 오는 18일 푸틴 대통령이 서명하고 내달 22일 국민투표에 부쳐질 예정이다.

국민투표에선 투표 참여자의 과반이 찬성하면 개헌안이 채택된다.

[특파원 시선] 푸틴, 개헌으로 30년 이상 장기집권 길 가나
크렘린궁이 의도했는지는 모르지만 3월 18일은 지난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부터 크림을 병합한 날이고, 4월 22일은 공교롭게도 옛 소련의 사회주의 혁명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의 생일이다.

2018년 4기 집권을 시작한 푸틴 대통령이 집권 중반에 왜 갑자기 개헌 카드를 꺼내 들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개헌 제안이 나온 직후나 개헌 절차가 급물살을 타고 있는 지금이나 여전히 논란거리다.

현행 러시아 헌법이 옛 소련 붕괴 직후인 1993년에 만들어져 개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일각에서 제기돼 온 만큼 푸틴 대통령이 이 같은 사회적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개헌을 제안했다는 선의의 분석이 나온다.

동시에 '개헌=푸틴의 권력 연장 시도'라는 비판적 견해도 만만찮다.

이들은 이미 20년을 권좌에 앉아있는 푸틴 대통령이 개헌을 통해 권력 연장과 영구 집권을 시도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지난 2000~2008년 4년 임기의 대통령직을 연임한 푸틴은 헌법의 3연임 금지 조항에 밀려 총리로 물러났다가 2012년 임기가 6년으로 늘어난 대통령직에 복귀했으며 뒤이어 2018년 재선돼 4기 집권을 이어가고 있다.

총리직에 있을 때도 막후에서 실질적 통치권을 행사했음을 고려하면 20년째 국가지도자로 군림하고 있는 것으로, 약 30년을 크렘린궁에 머문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 이후 러시아의 최장수 지도자다.

일각에선 푸틴이 2024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개헌으로 권한이 커질 상원이나 국가안보회의, 국가평의회 등의 수장으로 자리를 옮겨 '국부'(國父)로서 계속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특히 국가평의회는 현재는 실질적 권한이 없는 대통령 자문기구이지만 개헌 후엔 대내외정책의 기본 방향을 정하고, 모든 국가 권력기관의 업무를 조정하는 비중 있는 역할을 맡게 돼 푸틴이 낙점할 확률이 높은 선택지로 주목받았다.

다소 무게감은 떨어지지만 역시 개헌을 통해 권한이 강화될 헌법재판소 소장을 맡거나 지난 2008년에 했던 것처럼 다시 총리직을 맡는 방안도 제시됐다.

이와 함께 러시아가 1990년대 말부터 추진해 오고 있는 이웃 벨라루스와의 연합국가 창설을 성사시켜 푸틴 대통령이 그 수장을 맡는 방안도 지속해서 거론됐다.

이 같은 관측들을 뒷받침하듯 현지 언론에선 푸틴 대통령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측근들에게 장기집권으로 인한 피로를 호소하며 자신의 퇴임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특파원 시선] 푸틴, 개헌으로 30년 이상 장기집권 길 가나
하지만 달아오르던 푸틴 퇴임설은 지난 10일 하원의 개헌안 심의에 직접 참석한 푸틴이 2024년 자신의 대선 재출마를 허용하는 내용을 개헌안에 포함시키자는 여당 의원의 제안을 수용하면서 찬물을 맞았다.

세계 최초 여성 우주인으로 인기가 높은 '통합러시아당' 소속 의원 발렌티나 테레슈코바(83)는 헌법상의 임기 제한(두 차례)으로 차기 대선에 출마할 수 없는 푸틴에게 계속해 국가를 이끌 기회를 줘야 한다며 푸틴의 기존 임기 '백지화'를 제안했다.

이에 푸틴은 "헌법재판소의 (합헌) 판결이 필요하지만 원칙적으로 그러한 방안은 가능하다"고 동의했다.

푸틴이 때가 되면 적어도 대통령직에서는 물러날 것으로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충격적 발언이었다.

푸틴의 의중을 들은 하원은 곧바로 테레슈코바 의원의 제안을 압도적 지지로 개헌안에 포함시켰다.

이 안대로라면 푸틴의 기존 네 차례 임기는 백지화돼 2024년이면 72세가 되는 푸틴이 84세가 되는 2036년까지 6년 임기의 대통령직을 두 차례 더 역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된다.

사실상 종신 집권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동안 푸틴이 대통령직을 그만두고 어디로 옮겨갈지를 추측하기에 바빴던 분석가들은 그가 실제로 2024년 대선에 재출마할지와 갑작스레 그러한 가능성을 열어 놓은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관측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여기서도 의견은 엇갈린다.

일부 전문가들은 푸틴이 확실히 2024년 재출마와 집권 연장을 결심했다고 보지만, 다른 전문가들은 아직 최종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며 단지 정치적 선택의 폭을 넓혀 놓은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모스크바 카네기센터 소장 드미트리 트레닌은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국가평의회와 안보회의 등의 구상을 저울질하던 푸틴이 마침내 2024년에 재출마하는 쪽으로 마음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고 썼다.

같은 센터 연구원 알렉산드르 가부예프도 연합뉴스에 "자신에게 충성하는 대통령을 후계자로 앉히고 본인은 국가평의회나 안보회의 의장 등을 맡는 시나리오 이행이 어렵다고 판단해 직접 권력을 유지하는 방식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관측했다.

반면 크렘린궁에 가까운 한 소식통은 BBC 방송에 "푸틴이 반드시 2024년에 출마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은 아니다"면서 "단지 가능성의 창을 늘리고 2024년과 관련된 '끓는점'을 제거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자신의 2024년 이후 거취에 대해 불명확성을 남겨 놓음으로써 후계 논쟁 등이 미리 과열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고도의 계산된 행보라는 것이다.

러시아 대통령실 산하 국가경제·행정 아카데미(RANEPA) 교수 예카테리나 슐만도 "푸틴이 새 임기에 도전할지에 대한 결정이 무기한 연기된 것"이라면서 "헌법재판소가 (푸틴 재출마에 대해) 합헌 판결을 하더라도 그가 반드시 출마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출마)권리를 확보하는 것과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푸틴 대통령 자신은 물론 그가 이끄는 '내부서클'(inner circle) 내에서도 아직 푸틴의 2024년 이후 거취에 대해 확실한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며, 일단 개헌을 통해 운신의 폭을 최대한 넓히고 재출마 가능성도 남겨 놓아 '레임덕'을 차단하면서 향후 국내외 정치 상황을 살펴 적절한 시점에 최종 선택을 하려는 계산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12일 "러시아를 포함한 세계 여러나라가 현재 아주 아주 불안정한 상황에 있다"면서 러시아를 둘러싼 현재의 복잡한 상황이 임기와 관련한 푸틴 대통령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푸틴 대통령이 2024년 대선에 참여할지는 세계 경제 상황, 코로나19 여파, 각종 분쟁 등의 여러 요소를 고려해 결정될 것이라고 전했다.

[특파원 시선] 푸틴, 개헌으로 30년 이상 장기집권 길 가나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