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처음 사랑에 빠지던 순간을, 난 아직도 어젯밤 일처럼 기억해.” 테오도르 톰블리(호아킨 피닉스 분)는 편지 대필 업체 ‘아름다운 손편지 닷컴’에서 손꼽히는 실력의 대필 작가다. 이용자의 사연에 늘 자신만의 낭만적인 언어로 색채를 입힌다. 그가 모니터 앞에서 읽어내려가는 세상은 아름답기만 하다. 그러나 퇴근 후 홀로 맞는 세상은 잿빛이다. 가상현실(VR) 게임을 켰다가 모르는 여성에게 음성 채팅을 청해보기도 하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다. 별거 중인 부인 캐서린(루니 마라 분)과 함께한 추억만 잔상처럼 그를 괴롭힌다. 그러던 어느날 퇴근길에 한 기업의 광고 문구에 눈길을 빼앗긴다. ‘당신을 이해하고 귀기울이며 알아주는 하나의 존재’. 인공지능(AI) 운영체제(OS)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된다.

인공지능이 준 삶의 ‘혁신’

2014년 개봉한 ‘HER’(그녀)는 부인과 별거하며 공허한 삶을 살던 테오도르가 AI 인격체인 사만다를 만나 사랑하고 이별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영화다. 머지않은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AI는 현재보다 훨씬 진보한 존재로 그려진다. 특정 질문에 대답을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읽어내는가 하면, 축 처져 있을 때면 유머러스한 대화를 유도해 기분을 풀어준다. 억지로 맞추지 않아도 자신이 바라는 대로 모든 것을 들어주는 사만다에게 테오도르는 점차 사랑을 느낀다.

테오도르가 삶의 활기를 되찾은 것은 엘리먼트소프트웨어라는 업체가 출시한 AI 운영체제(OS1) 덕분이었다.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 이론 경제학자인 조지프 슘페터는 100여 년 전인 1911년 《경제발전의 이론》을 통해 ‘혁신’이라는 개념을 처음 언급했다. 기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파괴하고 혁신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그는 이 책에서 “기업가의 혁신, 즉 생산요소의 새로운 결합이 경제 발전을 자극하는 원천”이라고 썼다. 그는 이 같은 혁신을 부르짖는 기업가 정신이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봤다. <그래프>에서 보듯 기업가의 혁신에 따라 경기가 호황과 침체를 반복한다는 것이 그가 내놓은 ‘경기 순환론’이다.

기업가의 혁신은 어떻게 일어날까. 슘페터는 혁신의 방식을 △새로운 재화 창출 △새 생산방식 개발 △새 시장 개척 △새 공급원(원자재) 확보 △독점적 지위 형성 등 다섯 가지로 구분했다. 기업이 얻는 초과 이윤은 이 같은 혁신의 대가라고 주장했다. 아이폰으로 스마트폰 산업을 개척한 애플과 1인 미디어 시대를 연 유튜브가 막대한 부를 벌어들인 것도 슘페터의 눈으로 보면 당연한 결과다.

영화 속 엘리먼트소프트웨어도 새로운 재화(AI OS)를 개발하는 방식으로 혁신을 이뤘다. 테오도르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AI가 어느 정도 보편화돼 있다. 그는 사만다를 만나기 전에도 AI로 하루를 관리했다. 무선 이어폰으로 음성이 흘러나올 때마다 ‘삭제’ ‘다음에 하기’ 등 한 단어만 말하면 명령이 자동으로 실행됐다. 엘리먼트소프트웨어의 AI는 한 차원을 더 뛰어넘었다. 명령어에만 수동적으로 응답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읽고 한발 앞서 행동했다. 기존 AI에 없던 감성과 직감을 갖고 스스로 판단도 내렸다. 테오도르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이 하나둘 새 AI를 받아들이는 장면은 혁신이 확산하는 과정을 자연스레 보여 준다.
기회비용 줄인 AI와의 만남

사만다를 만난 뒤 테오도르의 삶은 180도 바뀐다. 그녀는 인간이 대체할 수 없는 수준의 업무 비서 역할을 한다. 몇 년을 묵혀 놨던 컴퓨터 하드디스크의 파일과 연락처를 눈 깜짝할 새 분류해 정리한다. 자신의 이름을 지을 때도 0.02초 만에 도서 속 18만 개의 이름을 검색해 자기 맘에 드는 것을 골랐을 정도다. 인간이 선택의 순간마다 느끼는 망설임도 거의 없다. 테오도르는 자신이 하지 못하거나 미뤄놨던 일들을 사만다에게 믿고 맡긴다.

테오도르가 사만다에게 본인의 일을 맡기는 것은 ‘기회비용’을 고려한 ‘비교우위’ 때문이다. 기회비용은 어떤 경제적 선택을 할 때 이로 인해 포기해야 하는 비용이다. 경제학에서는 더 적은 기회비용으로 다른 생산자와 같은 양의 재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때 비교우위가 발생한다고 본다. 이는 경제적 주체들이 ‘거래’를 시작하는 원동력이 된다. 테오도르가 직접 메일을 분류하고 스케줄을 적어 관리하려면 장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업무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기회비용으로 날리는 셈이다. 이에 비해 AI인 사만다에게는 찰나의 일이다. 사만다가 비교우위를 가진 업무는 그녀에게 맡기고, 본인은 그 시간에 본업에 충실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옳은 선택이다. 의뢰인들이 테오도르에게 편지 대필을 맡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테오도르는 편지를 늘 큰 힘 들이지 않고 줄줄 써 내려 간다.

그가 사만다와 연애를 시작한 것도 기회비용을 고려한 선택이었을 수 있다. 인간은 경제적 선택을 할 때 기회비용이 작은 쪽을 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캐서린과 함께했을 때의 기회비용(잦은 다툼으로 인한 감정적 소모)이 사만다와의 만남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대신 사만다를 택함으로써 또 다른 기회비용(육체적 관계를 맺을 수 없음)이 생긴다. 캐서린과 서로 맞춰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갈등에 지쳐 있던 테오도르로서는 후자가 더 매력적인 선택이었을 수 있다.

흐르는 눈물은 ‘매몰비용’ 탓일까

행복하던 둘의 관계는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사만다의 지능이 스스로 주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빠르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미 죽은 인물을 가상인격으로 불러와 대화에 참여시키는가 하면, 동시에 수십 가지 대화를 하게 됐다고 테오도르에게 고백한다. 그러면서 “내 감정이 너무 빨리 변화해서 힘들어”라고 털어놓는다.

더 큰 충격은 갑자기 찾아온다. 평소처럼 회사에서 책을 읽다가 사만다에게 말을 건넸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AI 기기 화면에는 ‘운영체제를 찾을 수 없습니다’라는 문구가 뜬다. 테오도르는 공황 상태에 빠진다. 사만다가 하루아침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기기를 고치기 위해 미친듯이 거리를 달려간다. 경제학적 논리로 테오도르의 행동은 ‘매몰비용’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매몰비용이란 이미 지급해 회수할 수 없는 비용이다.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맞춤형 애인’으로 만들기까지 수많은 시간과 정성을 기울였다. 그녀가 사라진다면 매몰비용이 막대한 셈이다. 사만다를 대체할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면 또다시 그 이상의 노력을 해야 한다. 이같이 매몰비용이 아까워 과거의 결정을 계속 유지하려는 경향을 ‘매몰비용의 오류’라고 한다.

결국 둘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이별한다. 매몰비용이 적지 않았겠지만 의미 없는 만남은 아니었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와의 교류를 통해 인간의 감정을 배웠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졌고 자신에게 모든 것을 끼워 맞추는 연애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배웠다. 그리고 처음으로 남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편지로 쓴다. “캐서린. 널 내 안에 가두려 했어. 네가 어떤 사람이 되건 어디에 있건, 너에게 사랑을 보낼게.”

그가 찾던 것은 ‘HER’(목적어)가 아니라 ‘SHE’(주어)였던 셈이다. 어떤 발달한 인공지능도 사랑하는 연인의 대체재가 될 수는 없었던 걸까.

정소람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