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HER'로 보는 인공지능 세상…AI와 사랑에 빠지면 매몰비용 따윈 없을 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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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노믹스
기회비용 적고 비교우위 넘치는 '모니터 속 그녀'
나보다 더 나를 이해해주고
일할 때 비서 역할까지 완벽한
컴퓨터 OS 속 연인 사만다
기회비용 적고 비교우위 넘치는 '모니터 속 그녀'
나보다 더 나를 이해해주고
일할 때 비서 역할까지 완벽한
컴퓨터 OS 속 연인 사만다

인공지능이 준 삶의 ‘혁신’

기업가의 혁신은 어떻게 일어날까. 슘페터는 혁신의 방식을 △새로운 재화 창출 △새 생산방식 개발 △새 시장 개척 △새 공급원(원자재) 확보 △독점적 지위 형성 등 다섯 가지로 구분했다. 기업이 얻는 초과 이윤은 이 같은 혁신의 대가라고 주장했다. 아이폰으로 스마트폰 산업을 개척한 애플과 1인 미디어 시대를 연 유튜브가 막대한 부를 벌어들인 것도 슘페터의 눈으로 보면 당연한 결과다.

사만다를 만난 뒤 테오도르의 삶은 180도 바뀐다. 그녀는 인간이 대체할 수 없는 수준의 업무 비서 역할을 한다. 몇 년을 묵혀 놨던 컴퓨터 하드디스크의 파일과 연락처를 눈 깜짝할 새 분류해 정리한다. 자신의 이름을 지을 때도 0.02초 만에 도서 속 18만 개의 이름을 검색해 자기 맘에 드는 것을 골랐을 정도다. 인간이 선택의 순간마다 느끼는 망설임도 거의 없다. 테오도르는 자신이 하지 못하거나 미뤄놨던 일들을 사만다에게 믿고 맡긴다.
테오도르가 사만다에게 본인의 일을 맡기는 것은 ‘기회비용’을 고려한 ‘비교우위’ 때문이다. 기회비용은 어떤 경제적 선택을 할 때 이로 인해 포기해야 하는 비용이다. 경제학에서는 더 적은 기회비용으로 다른 생산자와 같은 양의 재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때 비교우위가 발생한다고 본다. 이는 경제적 주체들이 ‘거래’를 시작하는 원동력이 된다. 테오도르가 직접 메일을 분류하고 스케줄을 적어 관리하려면 장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업무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기회비용으로 날리는 셈이다. 이에 비해 AI인 사만다에게는 찰나의 일이다. 사만다가 비교우위를 가진 업무는 그녀에게 맡기고, 본인은 그 시간에 본업에 충실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옳은 선택이다. 의뢰인들이 테오도르에게 편지 대필을 맡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테오도르는 편지를 늘 큰 힘 들이지 않고 줄줄 써 내려 간다.
흐르는 눈물은 ‘매몰비용’ 탓일까
행복하던 둘의 관계는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사만다의 지능이 스스로 주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빠르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미 죽은 인물을 가상인격으로 불러와 대화에 참여시키는가 하면, 동시에 수십 가지 대화를 하게 됐다고 테오도르에게 고백한다. 그러면서 “내 감정이 너무 빨리 변화해서 힘들어”라고 털어놓는다.
결국 둘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이별한다. 매몰비용이 적지 않았겠지만 의미 없는 만남은 아니었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와의 교류를 통해 인간의 감정을 배웠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졌고 자신에게 모든 것을 끼워 맞추는 연애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배웠다. 그리고 처음으로 남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편지로 쓴다. “캐서린. 널 내 안에 가두려 했어. 네가 어떤 사람이 되건 어디에 있건, 너에게 사랑을 보낼게.”
그가 찾던 것은 ‘HER’(목적어)가 아니라 ‘SHE’(주어)였던 셈이다. 어떤 발달한 인공지능도 사랑하는 연인의 대체재가 될 수는 없었던 걸까.
정소람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