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에 걸린 대형 벽화. 중일전쟁 때 중국 항일부대와 일본군의 전투 장면을 담았다.  /한경DB
베이징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에 걸린 대형 벽화. 중일전쟁 때 중국 항일부대와 일본군의 전투 장면을 담았다. /한경DB
1937년 7월 7일, 베이징 근교 완핑(宛平)의 루거우차오(蘆溝橋) 주변에서 중국 제29군과 일본 지나 주둔군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 야간훈련을 하던 병사 한 명이 실종됐다며 일본군 지휘관이 중국군 주둔지를 수색하겠다고 통보했다. 중국군이 이를 거부하면서 양측 간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날의 루거우차오 사건이 전면전으로 확대돼 중일전쟁으로 번졌다.

인도 출신 역사학자인 래너 미터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는 이 사건이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라고 규정한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는 학계의 통설과는 전혀 다른 주장이다. 추축국의 일원인 일본이 원자폭탄을 얻어맞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났으므로 가장 끝까지 버틴 일본군과 중국군이 전쟁을 시작한 때를 기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2차 대전은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시작해 아시아에서 끝났다는 얘기다.

《중일전쟁:역사가 망각한 그들 1937~1945》에서 미터 교수는 국지적 충돌로 시작된 전쟁이 중국 전역은 물론 인도차이나, 버마(현재의 미얀마), 인도까지 확대됐다가 일제의 패망으로 종결된 8년간의 전개 과정을 따라가며 전쟁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한다. 그러면서 중국이 자국 수호뿐만 아니라 세계대전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재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장제스(蔣介石)와 국민정부의 역할을 은폐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독재자의 이미지를 씌워온 서구와 중국 공산당 정권의 시각을 객관적으로 교정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책에 따르면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일본은 중국에 스승이자 피란처였고, 롤모델이었다. 수천 명의 중국인 유학생이 일본에서 공부했고, 쑨원을 비롯한 혁명가들은 정치적 탄압을 피해 도쿄로 망명했다. 중국의 개혁 엘리트들은 단기간에 군사화와 산업화를 실현한 일본을 중국의 모델로 삼았다.

1931년 일본이 일으킨 만주사변 이후 모든 것은 달라졌다. 장제스의 국민정부에 가장 긴급한 현안은 공산주의자나 군벌 세력, 또는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장제스는 처음에는 일본과의 전면적인 충돌을 피하려고 영토를 넘겨주는 굴욕을 감수했다. 하지만 끝이 없는 일본의 야욕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고, 8년간의 대일 항전은 막 근대적 국가로 전환하려던 중국에 미증유의 참화를 안겼다.

중일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최소 1500만 명, 난민은 80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난징(南京) 대학살, 충칭(重慶) 대폭격, 곳곳에서 자행된 독가스 살포와 생체 실험 등 일본의 만행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버겁다. 20세기 초반에 건설된 주요 철도망, 고속도로, 산업시설을 포함해 중국이 어렵사리 쌓아올린 근대적인 성과의 대부분이 파괴됐다.

책의 원제는 ‘Forgotten Ally(잊힌 연합국)’이다. 저자는 이런 참화를 겪고도 일본에 굴복하지 않은 중국의 항전이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까닭에 주목한다. 중국은 미국 영국 등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으로 싸웠는데도 2차 세계대전의 주역으로 대접받지 못해왔다는 것이다.

이유가 뭘까. 저자는 중국이 동맹이라고 여긴 미국 영국 소련 등의 연합국들이 유럽에서의 전쟁에 사활을 걸었을 뿐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전쟁에는 큰 관심이 없었으며,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기까지 4년 동안 중국은 사실상 혼자 힘으로 싸웠다. 그동안 가난한 후진국 중국은 고도의 기술력과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일본군 80만여 명을 아시아에 묶어놓았다.

이 모든 투쟁을 이끈 주역이 장제스였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항일 전쟁’의 주역으로 알려진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은 전쟁에서 부차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국공합작에도 불구하고 장제스의 국민당 군에게 공산당은 동지라기보다는 적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장제스와 국민정부의 역할은 전쟁이 끝난 후 폄하되고 왜곡됐다. 옛 연합국 동맹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드러내기 싫어했다. 내전에서 이긴 중국 공산당 정부는 대일항전의 공을 모두 자신들의 것으로 돌렸다. 장제스 정부가 전쟁에서 이기고도 ‘절뚝거리며 동정받지 못하는’ 신세가 된 것은 맹목적인 반공과 항일 포기, 멍청하고 원시적인 군사전략 때문이 아니라 국내 혼란, 신뢰할 수 없는 동맹국들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책에는 1931년 만주사변 후 부(不)저항 정책을 유지했던 장제스가 루거우차오 사건이 터지자 전면전을 결행하게 된 이유, 상하이와 우한에서의 격전, 모순과 딜레마의 연속이었던 국공합작, 마오쩌둥의 이중적인 모습, 중일전쟁이 국공내전으로 이어진 이유와 그 과정에서 미국 루스벨트 행정부가 저질렀던 수많은 오류와 실수 등 새로운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저자는 “기나긴 중일전쟁과 2차 세계대전에서 중국이 맡았던 중요한 역할에 대한 종합적이면서 완전한 재해석을 할 때가 됐다”면서 부패와 무능의 화신으로 그려진 장제스, 숭고한 인민의 지도자로 그려진 마오쩌둥에 대한 시각 교정과 ‘연합국 중국’에 대한 재평가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