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으로 빚은 모래성의 붕괴 '1997 경제 스릴러' 줄도산·실직대란…어쩌다 우린 또 '그 시절의 데자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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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노믹스
'국가부도의 날'로 되짚어 보는 경제 위기
OECD 가입 후 들뜬 그 시절
장밋빛 경기지표의 착시에
바닥경제 침몰 알아채지 못해
'국가부도의 날'로 되짚어 보는 경제 위기
OECD 가입 후 들뜬 그 시절
장밋빛 경기지표의 착시에
바닥경제 침몰 알아채지 못해
“지금은 삶이 바뀌는 순간이다. 계급, 신분이 싹 다 바뀌는 거다.”
1997년 11월. 고려종합금융에 다니던 윤정학 과장(유아인 분)은 한국의 경제위기를 직감한다. 그는 위기를 인생을 바꿀 기회로 활용하기로 한다. 윤 과장은 달러, 주식, 부동산 등에 순서대로 베팅해 삶을 바꿀 만한 부를 얻게 된다.
2018년 11월 개봉한 ‘국가부도의 날’이 재조명받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경제 충격이 과거 외환위기와 금융위기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치달을 것이란 우려가 커지면서다. ‘동학개미’들은 윤정학 같은 인생 역전을 꿈꾸며 주식시장으로 몰리고 있다. 그들의 꿈은 이뤄질까. 23년 전 위기의 원인은 무엇이고, 역사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잔치는 끝났다’…조용히 덮친 위기
‘국가부도의 날’은 1997년 말 한국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전부터 협상까지의 과정을 담은 영화다. 한국이 처한 당시 상황과 위기를 겪어내는 경제 주체들의 모습을 선명하게, 조금은 과장되게 보여준다.
영화는 한국 정부가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1주일 전인 1997년 11월 15일에서 시작한다. 정부와 언론은 한국 경제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을 쏟아내고 있었다. 한국은 1년 전인 1996년 12월 세계에서 32번째로 선진국 클럽이라고 불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영화는 당시 들뜬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한다. 한국은행은 동아시아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경제 펀더멘털(기초체력)은 튼튼하다는 보고서를 낸다. 1인당 국민소득은 1만달러를 유지하고 있었고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7%에 달했다. 당시 한 설문조사에서 국민 중 85%가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답했다.
위기는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영화는 서민들이 주로 듣는 라디오 프로를 통해 오빠가 다니는 회사에서 월급을 안 주고, 엄마 가게에 손님이 없고, 아버지가 운영하는 사업이 부도가 나서 이사를 가게 됐다는 사연들을 들려준다. 이미 바닥 경제는 침체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 주인공들은 각자 판단을 내린다. 위기를 감지한 윤정학은 회사를 그만두고 국가 부도에 ‘베팅’한다. 정부와 언론의 장밋빛 전망을 믿던 중소기업 사장 갑수(허준호 분)는 그간의 현금 거래 원칙을 깨고 5억원짜리 어음 계약을 맺었다. 한시현 한은 통화정책팀장(김혜수 분)은 정부를 설득해 위기를 막으려 한다. 재정국 차관(주우진 분)은 불필요한 혼란을 막기 위해 모든 정보를 공개하지 않기로 한다. 빚으로 쌓은 모래성의 붕괴
당시 한국 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과도한 여신(與信)이었다. 장밋빛 미래가 계속될 것이란 믿음에 너도나도 빚을 내 투자와 생산을 했다. 경제는 빠르게 발전했고, 부채로 쌓아올린 경제는 튼튼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버블이 꺼지고 부채 상환이 불가능해진 순간 모래성은 빠르게 무너졌다. 모건스탠리 동아시아 사업부는 11월 15일 모든 투자자에게 당장 한국을 떠나라는 메일을 보낸다. 해외 투자자들은 한국 기업에 빌려준 돈의 만기 연장을 거절하고, 돈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런 실제 상황은 영화에 그대로 묘사된다.
주식시장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이어진다. 외국인은 연일 한국 기업 주식을 매도했다. 해외 투자자가 빠져나가며 환율이 타격을 받았다. 11월 15일 583.8이던 종합주가지수는 IMF 구제금융 합의안에 서명한 12월 3일 379.3까지 떨어진다. 원·달러 환율 역시 같은 기간 달러당 792원에서 1610원으로 103.2% 급등(원화가치 급락)했다.
금융회사의 대출 부실 과정도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은행들은 기업에 돈을 빌려줄 때 그 회사의 사업성 등은 따지지도 않았다. 그냥 대출 신청을 하면 돈을 내줬다. 한 은행은 납입자본금이 8700억원에 불과했지만 한보에 1조800억원을 대출해줬다. 은행에서 어음을 발행하는 게 끝이 아니었다. 그 어음을 제2금융권인 종합금융사에 가져가면 그 금액만큼 바로 대출이 가능했다. 현금은 현금대로, 어음은 어음대로 대금 결제 등에 쓰였다. 계속 호황이 이어지면 문제가 없겠지만 어느 한 기업이 돈을 갚지 못하면 걷잡을 수 없이 부실이 이전되는 상황이었다.
시작된 불황의 그늘
마침내 연쇄부도가 시작됐다. 미도파백화점, 해태제과 등 탄탄한 기업들이 잇따라 무너졌다. 재계 서열 4위인 대우그룹마저 돌아온 어음을 막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결국 정부는 부족한 달러를 구하기 위해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기로 한다. 국가 부도 선언이었다. IMF는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금리 인상, 자본시장 개방, 노동시장 유연화 등을 요구했다. 이로 인한 충격은 한국의 총수요곡선을 이동시키는 역할을 했다. 한 나라 경제의 모든 재화와 서비스 수요량을 의미하는 총수요곡선은 개인의 소비지출, 기업의 투자 지출, 정부의 지출, 순수출의 변화 등에 따라 이동한다. IMF와의 협상안으로 소비 지출, 투자 지출이 모두 줄어드는 가운데 정부 지출은 늘지 않았다. 결국 총수요곡선은 <그래프>처럼 왼쪽으로 이동했다. 동시에 노동 공급 등이 줄며 총공급곡선도 왼쪽으로 이동했다. 한국 경제가 침체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IMF와의 협상 내용 준수는 대량해고, 빈부격차 확대 등으로 이어졌다. 1998년 한국은 실업자가 130만 명 발생해 고실업 국가가 됐다. 자살률은 전년 대비 42% 급증했다. 갑수는 끝까지 자기를 믿고 도와주던 거래처에 부도어음을 돌리고 살아남았다. 거래처 사장은 자기 집 안방에서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윤정학은 국가 부도에 베팅한 것이 적중해 갑부가 됐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릴까
그로부터 23년 후인 2020년.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며 경기 침체 우려는 나날이 커지고 있다. 그때와 같은 위기가 지금도 일어날까. 경제지표는 위기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IHS마킷에 따르면 지난달 한국의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는 전월(48.7)보다 4.5포인트 떨어져 44.2로 하락했다. 2009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코로나19 영향이 본격화한 이후의 실물 지표 악화가 확인되면 시장은 2차 충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노무라증권은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6.7%로 전망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점은 그때와 다르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기준금리를 연 0.75%로 인하했다. 정부는 재난기본소득, 채권안정펀드 등 부양책을 내놓고 있다. 환율 안정을 위해 미국과 600억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 계약도 맺었다. 하지만 정책의 효과를 단언하긴 어렵다.
동학개미로 불리는 개인투자자들은 낙관론에 베팅했다. 외환위기 당시 국내 투자자들이 헐값에 판 주식을 외국인투자자가 사들여 큰 수익을 올렸는데, 당시 쓰라린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가세했다. 개미들은 주가가 떨어질 때마다 대한민국 대표기업들의 주식을 사들이고 있다. 이들이 윤정학처럼 인생을 바꿀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영화 속 한시현은 얘기한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사고하며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강영연 기자 yykang@hankyung.com
1997년 11월. 고려종합금융에 다니던 윤정학 과장(유아인 분)은 한국의 경제위기를 직감한다. 그는 위기를 인생을 바꿀 기회로 활용하기로 한다. 윤 과장은 달러, 주식, 부동산 등에 순서대로 베팅해 삶을 바꿀 만한 부를 얻게 된다.
2018년 11월 개봉한 ‘국가부도의 날’이 재조명받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경제 충격이 과거 외환위기와 금융위기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치달을 것이란 우려가 커지면서다. ‘동학개미’들은 윤정학 같은 인생 역전을 꿈꾸며 주식시장으로 몰리고 있다. 그들의 꿈은 이뤄질까. 23년 전 위기의 원인은 무엇이고, 역사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잔치는 끝났다’…조용히 덮친 위기
‘국가부도의 날’은 1997년 말 한국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전부터 협상까지의 과정을 담은 영화다. 한국이 처한 당시 상황과 위기를 겪어내는 경제 주체들의 모습을 선명하게, 조금은 과장되게 보여준다.
영화는 한국 정부가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1주일 전인 1997년 11월 15일에서 시작한다. 정부와 언론은 한국 경제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을 쏟아내고 있었다. 한국은 1년 전인 1996년 12월 세계에서 32번째로 선진국 클럽이라고 불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영화는 당시 들뜬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한다. 한국은행은 동아시아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경제 펀더멘털(기초체력)은 튼튼하다는 보고서를 낸다. 1인당 국민소득은 1만달러를 유지하고 있었고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7%에 달했다. 당시 한 설문조사에서 국민 중 85%가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답했다.
위기는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영화는 서민들이 주로 듣는 라디오 프로를 통해 오빠가 다니는 회사에서 월급을 안 주고, 엄마 가게에 손님이 없고, 아버지가 운영하는 사업이 부도가 나서 이사를 가게 됐다는 사연들을 들려준다. 이미 바닥 경제는 침체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 주인공들은 각자 판단을 내린다. 위기를 감지한 윤정학은 회사를 그만두고 국가 부도에 ‘베팅’한다. 정부와 언론의 장밋빛 전망을 믿던 중소기업 사장 갑수(허준호 분)는 그간의 현금 거래 원칙을 깨고 5억원짜리 어음 계약을 맺었다. 한시현 한은 통화정책팀장(김혜수 분)은 정부를 설득해 위기를 막으려 한다. 재정국 차관(주우진 분)은 불필요한 혼란을 막기 위해 모든 정보를 공개하지 않기로 한다. 빚으로 쌓은 모래성의 붕괴
당시 한국 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과도한 여신(與信)이었다. 장밋빛 미래가 계속될 것이란 믿음에 너도나도 빚을 내 투자와 생산을 했다. 경제는 빠르게 발전했고, 부채로 쌓아올린 경제는 튼튼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버블이 꺼지고 부채 상환이 불가능해진 순간 모래성은 빠르게 무너졌다. 모건스탠리 동아시아 사업부는 11월 15일 모든 투자자에게 당장 한국을 떠나라는 메일을 보낸다. 해외 투자자들은 한국 기업에 빌려준 돈의 만기 연장을 거절하고, 돈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런 실제 상황은 영화에 그대로 묘사된다.
주식시장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이어진다. 외국인은 연일 한국 기업 주식을 매도했다. 해외 투자자가 빠져나가며 환율이 타격을 받았다. 11월 15일 583.8이던 종합주가지수는 IMF 구제금융 합의안에 서명한 12월 3일 379.3까지 떨어진다. 원·달러 환율 역시 같은 기간 달러당 792원에서 1610원으로 103.2% 급등(원화가치 급락)했다.
금융회사의 대출 부실 과정도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은행들은 기업에 돈을 빌려줄 때 그 회사의 사업성 등은 따지지도 않았다. 그냥 대출 신청을 하면 돈을 내줬다. 한 은행은 납입자본금이 8700억원에 불과했지만 한보에 1조800억원을 대출해줬다. 은행에서 어음을 발행하는 게 끝이 아니었다. 그 어음을 제2금융권인 종합금융사에 가져가면 그 금액만큼 바로 대출이 가능했다. 현금은 현금대로, 어음은 어음대로 대금 결제 등에 쓰였다. 계속 호황이 이어지면 문제가 없겠지만 어느 한 기업이 돈을 갚지 못하면 걷잡을 수 없이 부실이 이전되는 상황이었다.
시작된 불황의 그늘
마침내 연쇄부도가 시작됐다. 미도파백화점, 해태제과 등 탄탄한 기업들이 잇따라 무너졌다. 재계 서열 4위인 대우그룹마저 돌아온 어음을 막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결국 정부는 부족한 달러를 구하기 위해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기로 한다. 국가 부도 선언이었다. IMF는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금리 인상, 자본시장 개방, 노동시장 유연화 등을 요구했다. 이로 인한 충격은 한국의 총수요곡선을 이동시키는 역할을 했다. 한 나라 경제의 모든 재화와 서비스 수요량을 의미하는 총수요곡선은 개인의 소비지출, 기업의 투자 지출, 정부의 지출, 순수출의 변화 등에 따라 이동한다. IMF와의 협상안으로 소비 지출, 투자 지출이 모두 줄어드는 가운데 정부 지출은 늘지 않았다. 결국 총수요곡선은 <그래프>처럼 왼쪽으로 이동했다. 동시에 노동 공급 등이 줄며 총공급곡선도 왼쪽으로 이동했다. 한국 경제가 침체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IMF와의 협상 내용 준수는 대량해고, 빈부격차 확대 등으로 이어졌다. 1998년 한국은 실업자가 130만 명 발생해 고실업 국가가 됐다. 자살률은 전년 대비 42% 급증했다. 갑수는 끝까지 자기를 믿고 도와주던 거래처에 부도어음을 돌리고 살아남았다. 거래처 사장은 자기 집 안방에서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윤정학은 국가 부도에 베팅한 것이 적중해 갑부가 됐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릴까
그로부터 23년 후인 2020년.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며 경기 침체 우려는 나날이 커지고 있다. 그때와 같은 위기가 지금도 일어날까. 경제지표는 위기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IHS마킷에 따르면 지난달 한국의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는 전월(48.7)보다 4.5포인트 떨어져 44.2로 하락했다. 2009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코로나19 영향이 본격화한 이후의 실물 지표 악화가 확인되면 시장은 2차 충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노무라증권은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6.7%로 전망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점은 그때와 다르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기준금리를 연 0.75%로 인하했다. 정부는 재난기본소득, 채권안정펀드 등 부양책을 내놓고 있다. 환율 안정을 위해 미국과 600억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 계약도 맺었다. 하지만 정책의 효과를 단언하긴 어렵다.
동학개미로 불리는 개인투자자들은 낙관론에 베팅했다. 외환위기 당시 국내 투자자들이 헐값에 판 주식을 외국인투자자가 사들여 큰 수익을 올렸는데, 당시 쓰라린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가세했다. 개미들은 주가가 떨어질 때마다 대한민국 대표기업들의 주식을 사들이고 있다. 이들이 윤정학처럼 인생을 바꿀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영화 속 한시현은 얘기한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사고하며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강영연 기자 yy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