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뜬 '이야기 경제학'…이야기 펼쳐보니 [여기는 논설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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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경제학' 또는 '서사(敍事) 경제학'으로 번역할 수 있는 '내러티브 경제학(Narrative Economics)'이 갑작스레 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로버트 실러 미국 예일대 교수(사진)가 지난 12일(현지시간) 미 CNBC와의 인터뷰에서 "코로나19에 대한 공포 심리가 확산되면 경제를 공황에 몰아넣을 수 있다"고 경고한 게 계기였다. 코로나 사태에 따른 실물경제 타격 못지 않게 '코로나 공포 이야기'가 바이러스처럼 전파되며 경제가 회복불능 상태에 빠지는 데 역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서사구조를 갖추고 스토리에 강력한 전염성이 생기면 실제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게 '이야기 경제학'의 핵심 주장이다. 실러 교수는 작년 9월 같은 이름의 'Narrative Economics'란 책을 펴내 눈길을 끌었다. 전통 경제학이 데이터와 계량 분석에만 머물지 말고, 소셜네트워크(SNS)로 강력해진 스토리의 힘, 서사의 힘도 연구해야 한다는 '돌직구' 같은 문제제기였다.
◆'경제는 심리', 이야기로 풀어내다
'경제는 심리다'란 말은 경제에 문제가 있을 때 등장한다. 경기침체에서 더 나아가 'O월 위기설' 같은 불안감이 시장을 엄습할 때 위기 경보음을 울리는 언론의 보도에 정책당국자가 제동걸며 자주 하는 말이다. 당국자의 초조한 심정이 배어있기는 하나, 딱히 근거 없는 얘기라고 무시할 수도 없다. 인간의 행동을 심리학, 사회학, 생리학적 관점에서 연구하는 행동경제학이 각광받고 있으니, '그렇지 심리가 중요하지'라고 수긍하게 된다. 이야기 경제학은 이런 심리라는 소재를 이야기라는 영역으로 끌고와 풀어놓는다.
사람은 이야기를 통해 사고하고, 세계를 이해하고, 결정을 내린다. 정치 지도자와 정부 당국자, 산업계 리더들은 각종 사회현상을 설명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그런 이야기를 동원한다.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에 의해 경제라는 세상도 굴러간다. 암호화폐 비트코인이 대표적이다. 비트코인 창시자로 알려져 있지만 여전히 베일에 싸인 나카모토 사토시는 미스테리한 인물 이야기로 비트코인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암호화폐가 블록체인혁명의 총아로 각광받으며 진가를 인정받을 것이란 암호화폐 추종자들의 믿음이 그의 이야기로 더욱 단단해졌다.
1980년대 미국 레이건 정부 감세정책의 이론적 토대가 된 래퍼곡선도 내러티브의 힘을 보여준다. 경제학자 아더 래퍼가 한 식당에서 세율과 세수의 관계를 휴지조각에 그려 설명했다는 스토리가 덧입혀졌다. 이 이야기는 진위를 떠나 널리 전파돼 '래퍼곡선=감세정책'을 연상시켰고, 정책 추진에 큰 도움을 줬다는 후문이다. 실러 교수는 SNS 등 미디어와 구문으로 퍼진 아이디어가 이야기로 발전하고, 증시를 움직이고, 경제적 변화를 몰고 온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대량 실업과 전쟁까지도 불러올 수 있다고 한다.
◆데이터만으론 '경제 외눈박이' 된다
'이야기 경제학'의 기본 가정은 인간이 항상 합리적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전통 경제학에선 '인간은 합리적 기대를 기초로 모든 가용한 정보를 활용해 일관성 있게 최적상태를 추구한다'는 가정을 세운다. 물론 행동경제학 등이 대두하며 이 가정의 의미는 많이 약화됐다. 실러 교수는 사람들의 많은 행위가 실제로는 최적 의사결정이 아니며, 상당수 경제 현상은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에 좌우된다고 강조한다.
경제현상을 분석할 때 쓰는 각종 데이터도 그런 점에서 유용성을 다시 따져봐야 한다. 예를 들어, 국내총생산(GDP)는 사람들의 복지 상태(Human Welfare)를 측정하는 데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쟁시기의 복지 상태는 나빠지지만, GDP는 올라갈 수 있다. 금리, 실업률 같은 데이터들도 마찬가지다. 경제 전체를 설명한다며 총합 데이터에 의존해오던 것을 좀더 손에 잡히는 무언가로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실러 교수의 주장이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역작 21세기 자본에서 20개국의 지난 300년간에 걸친 경제, 역사 데이터를 분석했다는 점을 높게 평가받았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적으로 불기 시작한 자본주의 비판 흐름에 '젊은 소장파 학자의 치열한 불평등 연구'라는 이야기가 상승작용을 불러일으킨 측면이 있다. 사람들이 피케티의 방대한 데이터 분석에만 환호한 것은 아니란 얘기다.
◆'이야기의 대가'는 트럼프 대통령
'이야기'는 기존 서사의 퇴조, 새로운 서사의 등장이 반복되면서 계속 변화한다. 패닉에 빠진 시장 또는 자신감 충만한 시장, 검소함과 그 반대인 과시적 소비, 통화와 관련된 이야기들, 일자리를 만들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는 기계, 인공지능(AI), 부동산과 증시 붐과 붕괴 등이 주고받으며 내러티브를 풍성하게 만든다.
전통 경제학의 영역인 화폐금융정책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SNS를 잘 활용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이야기의 메이커다. 지난 해 10월 미국 중앙은행(Fed)은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내렸다. 그러자 트럼프는 트위터에서 "파월과 Fed가 또다시 실패했다. 배짱도 없고, 센스도 없고, 비전도 없다. 끔직한 소통가(communicator)!"라고 혹평했다. 경기 상황에 맞지 않게 금리를 너무 '찔끔' 내렸다는 얘기를 '배짱 없는 제롬 파월(Fed 의장)'이란 이야기로 바꿔 이목을 끈 것이다.
'이야기 메이커'들이 경제적 팩트(사실)를 허위정보(가짜뉴스)로 둔갑시킬 가능성은 항상 경계해야 한다. 실러 교수도 우려를 표명한 '자기 실현적 예언'이 돼 경제 전반에 큰 충격을 줄 수도 있다. 그가 제안한 '이야기 경제학'의 문제의식이 기존의 경제학 관념과 도구들을 얼마나 바꾸어 놓을 지 자못 관심이다.
장규호 논설위원 danielc@hankyung.com
'이야기'가 서사구조를 갖추고 스토리에 강력한 전염성이 생기면 실제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게 '이야기 경제학'의 핵심 주장이다. 실러 교수는 작년 9월 같은 이름의 'Narrative Economics'란 책을 펴내 눈길을 끌었다. 전통 경제학이 데이터와 계량 분석에만 머물지 말고, 소셜네트워크(SNS)로 강력해진 스토리의 힘, 서사의 힘도 연구해야 한다는 '돌직구' 같은 문제제기였다.
◆'경제는 심리', 이야기로 풀어내다
'경제는 심리다'란 말은 경제에 문제가 있을 때 등장한다. 경기침체에서 더 나아가 'O월 위기설' 같은 불안감이 시장을 엄습할 때 위기 경보음을 울리는 언론의 보도에 정책당국자가 제동걸며 자주 하는 말이다. 당국자의 초조한 심정이 배어있기는 하나, 딱히 근거 없는 얘기라고 무시할 수도 없다. 인간의 행동을 심리학, 사회학, 생리학적 관점에서 연구하는 행동경제학이 각광받고 있으니, '그렇지 심리가 중요하지'라고 수긍하게 된다. 이야기 경제학은 이런 심리라는 소재를 이야기라는 영역으로 끌고와 풀어놓는다.
사람은 이야기를 통해 사고하고, 세계를 이해하고, 결정을 내린다. 정치 지도자와 정부 당국자, 산업계 리더들은 각종 사회현상을 설명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그런 이야기를 동원한다.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에 의해 경제라는 세상도 굴러간다. 암호화폐 비트코인이 대표적이다. 비트코인 창시자로 알려져 있지만 여전히 베일에 싸인 나카모토 사토시는 미스테리한 인물 이야기로 비트코인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암호화폐가 블록체인혁명의 총아로 각광받으며 진가를 인정받을 것이란 암호화폐 추종자들의 믿음이 그의 이야기로 더욱 단단해졌다.
1980년대 미국 레이건 정부 감세정책의 이론적 토대가 된 래퍼곡선도 내러티브의 힘을 보여준다. 경제학자 아더 래퍼가 한 식당에서 세율과 세수의 관계를 휴지조각에 그려 설명했다는 스토리가 덧입혀졌다. 이 이야기는 진위를 떠나 널리 전파돼 '래퍼곡선=감세정책'을 연상시켰고, 정책 추진에 큰 도움을 줬다는 후문이다. 실러 교수는 SNS 등 미디어와 구문으로 퍼진 아이디어가 이야기로 발전하고, 증시를 움직이고, 경제적 변화를 몰고 온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대량 실업과 전쟁까지도 불러올 수 있다고 한다.
◆데이터만으론 '경제 외눈박이' 된다
'이야기 경제학'의 기본 가정은 인간이 항상 합리적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전통 경제학에선 '인간은 합리적 기대를 기초로 모든 가용한 정보를 활용해 일관성 있게 최적상태를 추구한다'는 가정을 세운다. 물론 행동경제학 등이 대두하며 이 가정의 의미는 많이 약화됐다. 실러 교수는 사람들의 많은 행위가 실제로는 최적 의사결정이 아니며, 상당수 경제 현상은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에 좌우된다고 강조한다.
경제현상을 분석할 때 쓰는 각종 데이터도 그런 점에서 유용성을 다시 따져봐야 한다. 예를 들어, 국내총생산(GDP)는 사람들의 복지 상태(Human Welfare)를 측정하는 데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쟁시기의 복지 상태는 나빠지지만, GDP는 올라갈 수 있다. 금리, 실업률 같은 데이터들도 마찬가지다. 경제 전체를 설명한다며 총합 데이터에 의존해오던 것을 좀더 손에 잡히는 무언가로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실러 교수의 주장이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역작 21세기 자본에서 20개국의 지난 300년간에 걸친 경제, 역사 데이터를 분석했다는 점을 높게 평가받았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적으로 불기 시작한 자본주의 비판 흐름에 '젊은 소장파 학자의 치열한 불평등 연구'라는 이야기가 상승작용을 불러일으킨 측면이 있다. 사람들이 피케티의 방대한 데이터 분석에만 환호한 것은 아니란 얘기다.
◆'이야기의 대가'는 트럼프 대통령
'이야기'는 기존 서사의 퇴조, 새로운 서사의 등장이 반복되면서 계속 변화한다. 패닉에 빠진 시장 또는 자신감 충만한 시장, 검소함과 그 반대인 과시적 소비, 통화와 관련된 이야기들, 일자리를 만들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는 기계, 인공지능(AI), 부동산과 증시 붐과 붕괴 등이 주고받으며 내러티브를 풍성하게 만든다.
전통 경제학의 영역인 화폐금융정책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SNS를 잘 활용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이야기의 메이커다. 지난 해 10월 미국 중앙은행(Fed)은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내렸다. 그러자 트럼프는 트위터에서 "파월과 Fed가 또다시 실패했다. 배짱도 없고, 센스도 없고, 비전도 없다. 끔직한 소통가(communicator)!"라고 혹평했다. 경기 상황에 맞지 않게 금리를 너무 '찔끔' 내렸다는 얘기를 '배짱 없는 제롬 파월(Fed 의장)'이란 이야기로 바꿔 이목을 끈 것이다.
'이야기 메이커'들이 경제적 팩트(사실)를 허위정보(가짜뉴스)로 둔갑시킬 가능성은 항상 경계해야 한다. 실러 교수도 우려를 표명한 '자기 실현적 예언'이 돼 경제 전반에 큰 충격을 줄 수도 있다. 그가 제안한 '이야기 경제학'의 문제의식이 기존의 경제학 관념과 도구들을 얼마나 바꾸어 놓을 지 자못 관심이다.
장규호 논설위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