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아무튼, 의미
한국인은 선천적으로 행복해지기 힘들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머리가 좋지만, 뇌에서 나오는 행복전달물질(아난다마이드)이 가장 적게 분비되기 때문이라는 게 심리학자들의 설명이다.

행복해지기 힘든 한국인들은 그래서 부지런히 뭔가를 할 수밖에 없다. 쉼 없이 일하고, 밤새 술 마시고, 또 일한다. 아이들에게도 강요한다. 놀이동산에서 자유이용권을 사준 뒤 악착같이 놀라고 등을 떠민다. 좋은 머리, 불만족, 부지런함의 결합은 성공적이었다. 산업화에 성공하고, 변방 국가를 우리의 문화 수출국으로 바꿔놨다.

동학개미들이 찾은 의미

행복해지기 힘든 사람들의 또 다른 선택은 의미 부여다.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행복전달물질을 대체하려 한다. 예를 들어보자. 마스크를 줄 서서 사지 않는 것은 게으름 탓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분이 몇 개 있으니 어르신들에게 기회를 드려야지.” 그리고 뿌듯해한다. 투표도 비슷하다. 투표 마감 한 시간 전부터 투표율은 4~5%포인트 가파르게 올라간다. 마지막 순간 자신의 표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발상이다.

2020년 봄 한국 사회에서 ‘의미 부여형 인간’의 면모는 잘 드러났다. 우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대구에서 확진자가 급증하자 전국의 의사와 간호사, 구급대원들은 대구로 향했다. 이득이 아니라 의미를 찾아갔다. 많은 이들은 그들의 사진을 보며 울컥했다. 어렵게 산 마스크를 대구로 보내기도 했다. 사재기를 하고 싶지만 참았다. 열만 있어도 진료소로 달려갔다.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전에도 한국인들은 위기 때마다 의미 부여형 본성을 드러냈다.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아이들의 금반지를 선뜻 내놨다. 충남 태안에서 유조선이 침몰했을 때는 휴가를 가 해변의 석유를 닦아내 자연상태로 돌려놨다.

올봄에는 투자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지난달 주가가 폭락하자 개인투자자들은 낙폭과대 우량주를 마구 사들였다. 누군가 이 투자에 ‘동학개미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투자를 의병활동에 비유한 뒤 사람들은 너도나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증권사로 향했다. 그렇게 주식을 순매수한 게 한 달 반 동안 15조원이 넘는다.

의미를 찾지 못한 야당의 패배

지난 4월 15일. 의미 부여형 사회는 선거라는 ‘정치 소비’를 행했다. 선거는 마케팅과 비슷하다. 상품(후보)의 질과 가치(공약, 슬로건), 캠페인 전략을 소비한다. 총선 결과는 야당의 참패였다. 모든 면에서 졌다. 먼저 상품을 보자. 야당의 대표 상품은 차기 대선 후보다. 하지만 상대방 후보에게 처음부터 밀렸다. 대표 상품이 부족하면 다양한 신상(새로운 인물)으로 승부해야 하지만 못했다. 공약도 기억나지 않는다. 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 박근혜 후보는 기초노령연금을 들고나왔다. “모든 어르신들께 월 20만원 지급.” 결정적 한 방이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야당은 ‘심판과 견제’만 되뇌었다. 정부가 주도하는 코로나 이슈에 끌려다녔다. 실언과 공천잡음은 표를 깎아 먹는 추가 메뉴였다. 먹고사는 것보다 죽고 사는 게 먼저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이들에게 유권자는 의미를 담은 한 표를 던졌다. 캠페인의 패배, 그뿐이다.

선거 결과를 놓고 사회 주류가 진보로 바뀌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분석하면 인구 구조를 바꾸자는 말이나 하고 있어야 한다. 의미를, 가치를 주지 못하면 거대 여당도 소수당으로 전락시켜버리는 게 한국 정치 소비자들이다.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