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텍사스원유(WTI) 5월 인도분 가격이 최근 마이너스로 폭락하면서 주요 증권사의 홈트레이딩시스템(HTS)이 먹통이 된 것과 관련해 증권사들의 안일한 태도가 도마에 오르고 있다. 앞서 시카고상품거래소(CME)가 “마이너스 유가 상황에 대비하겠다”는 공지를 했지만 이를 남의 일로만 여기고 국내 증권사들은 제대로 대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금융감독원도 ‘증권사 책임론’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22일 증권가에 따르면 CME는 이달 3일부터 15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자사 홈페이지에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원유선물이 마이너스 가격에 거래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내용의 공지를 했다. CME는 “이런 상황에 대비해 CME의 거래시스템이 마이너스 가격을 인식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며 “다른 증권사도 이를 확인하고 싶으면 CME가 배포한 자료를 활용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국내 증권사 상당수는 이러한 CME의 공지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냥 넘겼다. 이로 인해 키움증권, 한국투자증권, 유안타증권 등에서 지난 21일 새벽에 HTS가 마이너스 유가를 인식 못해 투자자의 매도 주문이 먹혀들지 않는 사고가 났다. 시스템 오류로 증권사의 반대매매도 제때 나오지 않았다. 당일 새벽 3시30분에 미니WTI선물 만기가 돼 강제 청산하는 시점에서는 손실 폭이 훨씬 커진 상태였다. 그 결과 마이너스가 찍힌 미수계좌가 속출했다.

증권사도 당혹스럽다는 반응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담당 부서에서 CME의 공지를 봤지만 실제로 이런 상황이 발생할 거라고는 예상 못해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며 “공지가 ‘대비하고 싶으면 하라’는 거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면도 있다”고 말했다. 다른 증권사 관계자는 “전산 개발과 관련된 이슈는 CME가 이메일로 알려주는 게 보통인데 이번에는 홈페이지에 공지만 해서 담당 팀이 이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증권사들은 자사의 시스템 오류로 사고가 난 만큼 소송 등의 방법을 거치지 않고 자체적으로 보상해주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키움증권 관계자는 “내부 규정에 따라 관련 절차를 진행하기 위해 검토중”이라고 말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CME가 세 차례나 관련 공지를 했고, 다른 증권사는 마이너스 유가 인식이 가능한 곳도 있었다”며 “문제가 생긴 증권사는 보다 책임 있는 자세로 피해 보상에 나서는 게 맞다”고 말했다.

다만 규모가 크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상장지수증권(ETN)이나 상장지수펀드(ETF)가 아닌 원유선물을 직접 매수한 투자자가 많지 않은데다가, 사고가 난 시점은 5월 인도분의 만기 직전으로 해당 물량을 그때까지 갖고 있었던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키움증권 관계자는 “민원제기가 들어온 손실 규모는 건 10억원 전후”라고 말했다.

양병훈/오형주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