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코리아(Korea)'와 베트남 [박동휘의 베트남은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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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북한이 베트남보다 2배 잘 살아
절박함으로 개혁·개방 택한 호치민의 후예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입으로만 '천지개벽' 외쳐
절박함으로 개혁·개방 택한 호치민의 후예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입으로만 '천지개벽' 외쳐
베트남은 ‘두 개의 코리아(Korea)’와 밀접히 관계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중국과 남북한의 관계에 비해 밀도는 떨어질 수 있으나, 오히려 물리적 거리 덕분에 훨씬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과 한반도는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오늘날의 지정학적 관점으로 봐도 껄끄러운 관계다. 베트남은 한반도와 역사적 은원(恩怨)도 없고, 국경을 맞댄 것도 아니어서 ‘두 개의 한국’과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맺어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2월 하노이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것은 한반도와 베트남 간의 이런 관계와 무관치 않다.
베트남이 ‘두 개의 한국’에 대해 갖는 감정은 정부(正負)의 수식과 비슷하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남한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선망과 동시에 강한 질투심을 표출한다. 베트남의 한 젊은 유튜버는 이렇게 강조했다. “베트남 인구의 절반만 열심히 공부하면 한국을 따라 잡는 건 시간문제다” 베트남 특유의 ‘잠재력 프레임’이다. 60대 이상 베트남의 ‘오피니언 리더’들도 비슷한 감정을 드러내곤 한다. 젊은 세대만큼 직설적이진 않지만, 그들의 뇌리엔 한국전쟁 직후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했던 1960년대 남한의 잔상이 깊게 남아 있다.
남한에 가졌던 ‘마이너스적인 감정’을 베트남 사람들은 북한의 빠져나올 길 없어 보이는 암담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상쇄시킨다. 베트남의 한 전직 고위 관료와 대화를 나누다 이 같은 한반도에 대한 ‘감정의 공식’을 느낀 적이 있다. 한국의 대(對)베트남 투자에 관해 한창 대화를 나누던 중에 그는 뜬금없이 북한 얘기를 꺼냈다. “하노이에 TV가 몇 대 밖에 없던 1970년대에 북한 뉴스가 자주 나왔어요. 유아원 모습이 화면에 비춰졌는데 분홍빛으로 볼 살이 토실토실하던 북한 아이들을 보고 얼마나 부러워했던지 모릅니다. 그런데 요즘은 북한 고위층들이 하노이에 와서 유치원을 견학 다녀오고는 우리를 부러워해요” 1980년대 말까지만해도 북한의 1인당 실질 GDP(국내총생산)는 2000달러를 웃돌았다. 미국과의 전쟁으로 ‘석기 시대’로 돌아간 베트남은 1000달러를 간신히 넘던 시절이다.
베트남어 표현 중에 ‘Buồn như mất sổ gạo’라는 게 있다. 우리말로 하면 ‘쌀 지급표를 잃은 표정’이라는 뜻이다. 망연자실한 슬픈 감정을 표현한 것으로 지금까지도 쓰인다. 배급표를 나눠주던 계획경제 시절의 곤궁함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려준다. 동시에 베트남이 시장경제로 전환한 게 아주 먼 오래 전의 일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다. 베트남이 ‘도이머이’라 불리는 개혁개방 정책을 채택한 건 1986년이지만, 실제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택한 건 1989~1990년 소련으로부터의 원조가 완전히 끊기고 나서부터다. 대략 30년의 시간을 ‘체제 변화 없는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위해 보내 온 셈이다. 이 시간을 또 다른 기준으로 환산하면, 북한과 베트남의 격차라고 할 수 있다. 꽤 긴 시간처럼 보이지만, 베트남과 한국의 격차를 생각하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니다. 2018년 베트남의 1인당 실질 GDP(물가와 화폐가치를 감안한 구매력지수, PPP)는 6676달러로 한국의 1984년 수준이다. 34년의 격차다. 베트남이 한국을 따라잡겠다고 벼르고 있는 만큼, 베트남이 북한에 따라잡히는 일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미·북 하노이 정상회담 때 삼성전자가 북한에 투자를 시작할 것이란 ‘낭설’이 퍼진 적이 있는데 베트남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라는 법이 없다며 내심 불안해했다고 한다. 베트남 미래의 경쟁자는 북한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출발선으로 따지자면, 북한은 베트남보다 상대적으로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베트남은 프랑스, 미국과 약 20년 간의 전쟁을 치렀다. 국토는 폐허가 됐다. 산업 시설이라고는 남은 게 없었다. 베트남과 중국 국경의 성(省)인 라오까이에 있던 거의 유일했던 화력 발전소는 1979년 캄보디아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중국과 전투를 벌이면서 파괴됐다. 이에 비해 북한은 자체 군수 공장을 운영할 정도로 제조업 기반을 갖고 있었다. 북한은 베트남전쟁 당시 공군을 지원했다. 사회주의 우방 가운데 우등생으로 꼽혔다. 한국전쟁은 벌써 30여 년 전 먼 옛일이었다. 전후 복구에 매달려야했던 베트남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 같은 절실함의 차이가 1980년대 베트남과 북한이 각각 내렸던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베트남은 개혁과 개방을 택했고, 북한은 자립이라는 명분으로 1인 독재 공고화와 국제적 고립을 택했다. 북한에게도 기회는 분명히 있었다. 김일성은 1984년 초 선전 특구를 방문해 ‘천지개벽’이란 말로 중국식 개혁개방에 호의를 표했다. 중국은 1978년 선전을 포함한 11개의 특구를 지정해 점(点)→선(線)→면(面) 방식의 단계적인 개혁개방을 실행 중이었다. 김일성은 선전을 다녀오고 난 뒤에 합영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외국인과 북한 국영기업 간 합작에 관한 법률로,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한 개혁조치도 없이 김칫국부터 마신 셈이다.
당시 김일성은 선전의 발전상에 놀라워했지만, 중국식 단계적 개방을 북한에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는 언론에 기고한 글에서 이에 관한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준 적이 있다. “과거 북한을 방문할 때마다 북한 인사들에게 “옆집(중국)에 좋은 선생님이 있는데 왜 벤치마킹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대답은 한결같았다. 북한은 종심(縱深)이 작아서 중국처럼 할 수 없다고 한다. 남포와 원산을 개방하면 평양도 개방할 수밖에 없어서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면 무슨 대안이 있느냐고 반문하면 ‘우리 식대로 간다. 장군님이 다 알아서한다’는 답변이 돌아와 토론이 지속되지 않았다”
북한이 개혁개방을 택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경제적 절박함의 부족이었다. 당시 북한의 상황은 오늘날과는 매우 달랐다. 국제사회로부터 경제 제재를 받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냉전 시대의 혜택을 고루 누렸다. 광물 자원이 풍부하고 과학기술이 발달한 북한은 사회주의 진영의 핵심이었다. 이에 비해 베트남은 1979년 2월 중월전쟁(中越戰爭)으로 가장 중요한 교역국이자 원조국을 잃었다. 미국은 1975년 베트남전쟁이 종식되자마자 베트남에 경제제재를 가했다. 1980년 초중반엔 동유럽들도 베트남과의 교역 및 원조를 사실상 중단했다. 폴란드 등 동유럽의 베트남 우방들은 민주화 물결에 휘말리며 그야말로 제 코가 석자인 상황이었다. 급기야 1989년엔 해체 위기에 몰려 있던 소련마저 베트남에 대한 원조를 끊었다. 석유, 철, 비료 등 국가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물자를 사회주의 우방에 의존해왔던 베트남은 사면초가의 상황에 놓였다.
베트남은 개혁개방 없이는 공산당 1당 지배체제조차 지켜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양국이 각각의 사정에 따라 1980년대 후반에 내린 결정은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냈다. 베트남은 1992년부터 1997년 글로벌 경제위기 직전까지 연 평균 9%에 육박하는 GDP 성장률을 달성했다. 북한이 맞닥뜨린 상황은 궤멸적이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국제적 고립으로 성장률이 정체된 데다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대기근이 북한 전역을 휩쓸었다. 1995~1998년까지 이어진 ‘고난의 행군’은 지상낙원이라고 선전해왔던 북한의 ‘프로파간다’를 한순간에 허위로 만들었다. 사회주의 진영 내 우등생의 지위도 베트남에 넘겨줘야했다.
‘고난의 행군’ 시절과 관련해 북한과 베트남 간 일화는 양국의 지위가 어떻게 역전됐는지를 잘 보여준다. 당시 북한은 베트남전쟁 시절 공군을 파견했던 은혜를 마치 차용증처럼 생각해 베트남에 쌀 등 식량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미국과 막 관계 개선을 꾀하고 있던 베트남은 북한의 요구를 거절했다. 1995년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던 시절, 북한은 1차 핵위기를 일으키며 미국 등 국제사회를 자극했다. 2000년경 북한을 방문한 한 노동계 인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북한 초청으로 노동계 등 45명의 인사들이 정부 승인 하에 방북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북한직총 간부가 베트남에 대해 한 말이 지금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싸가지 없는 민족이라고 말하더군요”
2000년 들어서도 베트남과 북한은 정반대의 길로 갔다. 1995년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에 가입함으로써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첫 활동을 시작한 베트남은 2007년엔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다. 전쟁을 치렀던 미국과는 정치, 경제적 관계를 완벽하게 복원했다. 미국은 1994년 2월 대베트남 경제제재 조치를 해제했고, 1995년 7월엔 베트남과 국교를 정상화시켰다. 이어 2000년 7월 베트남-미국 양자무역협정이 체결됐고, 2000년 11월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을 공식 방문했다. 2005년 6월 판 반 카이(Phan Van Khai) 총리는 베트남전 이후 베트남의 정상급 인사로서는 최초로 미국을 방문해 양국 정상 간 공동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전쟁의 기억을 모두 털어냈다.
김정일은 2001년 1월 15일부터 5박 6일 동안 중국 서부 해안가 경제 개혁개방 특구의 상징인 상하이(上海) 푸둥지구 등 첨단 산업 금융도시를 방문해 다시 한번 ‘천지개벽’ 발언을 했다. 약 반 년 전인 2000년 5월 당시 주룽지 중국 총리가 김정일과 단독 면담 뒤 조심스럽게 개방을 권유한 뒤의 일이다. 김씨 부자(父子)는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천지개벽할 정도로 변했다”는 말로 감탄을 쏟아냈지만, 평양에 돌아가기만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립과 핵무기 개발로 돌아갔다. 김정일이 2002~2003년에 야심차게 추진한 경제개혁은 생산성을 높이는데 실패했고, 인민에게 인플레이션이란 고통만 안겼다.
김정일은 김일성이 그랬듯이 김씨 일가의 독재를 유지하는 데에만 골몰했다. 중국은 여전히 석유와 식량을 북한에 지원했다. 2000년 들어서 또 하나의 수혈원이 등장했다. 바로 남한이었다.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교류협력은 새로운 단계로 도약했다. 2000년 8월 9일 남쪽의 현대 아산과 북쪽의 아태, 민경련간 ‘개성공업지구건설운영에 관한 합의서’가 체결됐다. 개성공단은 2004년 시범 생산을 시작으로 2010년엔 입주기업 생산액이 10억달러를 돌파했다. ‘남부인(Southerner)의 역할’에 관해선 베트남과 북한의 체제 이행 연구와 관련해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다. 베트남의 경우 남베트남인들의 경험은 시장경제로의 이행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호찌민(옛 사이공)의 개방성을 신뢰했다. 북한 역시 한국으로부터 시장경제의 경험을 전수받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남부인의 역할’은 베트남의 그것과는 달랐다.
베트남은 처절하게 밑바닥까지 떨어진 뒤에 시장경제를 받아들였다. 중국이 점, 선, 면 방식으로 단계적인 변화로 체제 안정을 유지했다면, 베트남은 완충 장치도 없이 시장경제로 직진했다. 베트남이 이룬 성과는 사회주의 국가들 중 유일무이하다고 할 수 있다. 약소국이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성장을 동시에 달성한 사례다. 호치민 주석 이래 베트남이 공고하게 구축한 집단지도체제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최근 CNN발(發) 북한 급변 시나리오가 한반도의 긴장을 높이고 있다. 일본 유력 매체들은 김여정이 김정은 유고시 전권을 쥘 것이라고 보도할 정도다. 아직 정확한 사실이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김정은 사망에 따른 후폭풍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을 몰고 올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 무역전쟁에 이어 ‘코로나19 전쟁’까지 치르고 있는 터라 북한 급변은 동북아시아 정세에 ‘블랙스완 효과(극단적으로 예외적이어서 발생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 일단 발생하면 엄청난 충격과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사건)’를 가져 올 가능성이 높다. 무엇이 됐건 북한의 진정한 변화를 위한 거위의 날개짓이 되길 기대해본다.
박동휘 하노이 특파원 donghuip@hankyung.com
베트남이 ‘두 개의 한국’에 대해 갖는 감정은 정부(正負)의 수식과 비슷하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남한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선망과 동시에 강한 질투심을 표출한다. 베트남의 한 젊은 유튜버는 이렇게 강조했다. “베트남 인구의 절반만 열심히 공부하면 한국을 따라 잡는 건 시간문제다” 베트남 특유의 ‘잠재력 프레임’이다. 60대 이상 베트남의 ‘오피니언 리더’들도 비슷한 감정을 드러내곤 한다. 젊은 세대만큼 직설적이진 않지만, 그들의 뇌리엔 한국전쟁 직후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했던 1960년대 남한의 잔상이 깊게 남아 있다.
남한에 가졌던 ‘마이너스적인 감정’을 베트남 사람들은 북한의 빠져나올 길 없어 보이는 암담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상쇄시킨다. 베트남의 한 전직 고위 관료와 대화를 나누다 이 같은 한반도에 대한 ‘감정의 공식’을 느낀 적이 있다. 한국의 대(對)베트남 투자에 관해 한창 대화를 나누던 중에 그는 뜬금없이 북한 얘기를 꺼냈다. “하노이에 TV가 몇 대 밖에 없던 1970년대에 북한 뉴스가 자주 나왔어요. 유아원 모습이 화면에 비춰졌는데 분홍빛으로 볼 살이 토실토실하던 북한 아이들을 보고 얼마나 부러워했던지 모릅니다. 그런데 요즘은 북한 고위층들이 하노이에 와서 유치원을 견학 다녀오고는 우리를 부러워해요” 1980년대 말까지만해도 북한의 1인당 실질 GDP(국내총생산)는 2000달러를 웃돌았다. 미국과의 전쟁으로 ‘석기 시대’로 돌아간 베트남은 1000달러를 간신히 넘던 시절이다.
베트남어 표현 중에 ‘Buồn như mất sổ gạo’라는 게 있다. 우리말로 하면 ‘쌀 지급표를 잃은 표정’이라는 뜻이다. 망연자실한 슬픈 감정을 표현한 것으로 지금까지도 쓰인다. 배급표를 나눠주던 계획경제 시절의 곤궁함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려준다. 동시에 베트남이 시장경제로 전환한 게 아주 먼 오래 전의 일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다. 베트남이 ‘도이머이’라 불리는 개혁개방 정책을 채택한 건 1986년이지만, 실제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택한 건 1989~1990년 소련으로부터의 원조가 완전히 끊기고 나서부터다. 대략 30년의 시간을 ‘체제 변화 없는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위해 보내 온 셈이다. 이 시간을 또 다른 기준으로 환산하면, 북한과 베트남의 격차라고 할 수 있다. 꽤 긴 시간처럼 보이지만, 베트남과 한국의 격차를 생각하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니다. 2018년 베트남의 1인당 실질 GDP(물가와 화폐가치를 감안한 구매력지수, PPP)는 6676달러로 한국의 1984년 수준이다. 34년의 격차다. 베트남이 한국을 따라잡겠다고 벼르고 있는 만큼, 베트남이 북한에 따라잡히는 일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미·북 하노이 정상회담 때 삼성전자가 북한에 투자를 시작할 것이란 ‘낭설’이 퍼진 적이 있는데 베트남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라는 법이 없다며 내심 불안해했다고 한다. 베트남 미래의 경쟁자는 북한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출발선으로 따지자면, 북한은 베트남보다 상대적으로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베트남은 프랑스, 미국과 약 20년 간의 전쟁을 치렀다. 국토는 폐허가 됐다. 산업 시설이라고는 남은 게 없었다. 베트남과 중국 국경의 성(省)인 라오까이에 있던 거의 유일했던 화력 발전소는 1979년 캄보디아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중국과 전투를 벌이면서 파괴됐다. 이에 비해 북한은 자체 군수 공장을 운영할 정도로 제조업 기반을 갖고 있었다. 북한은 베트남전쟁 당시 공군을 지원했다. 사회주의 우방 가운데 우등생으로 꼽혔다. 한국전쟁은 벌써 30여 년 전 먼 옛일이었다. 전후 복구에 매달려야했던 베트남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 같은 절실함의 차이가 1980년대 베트남과 북한이 각각 내렸던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베트남은 개혁과 개방을 택했고, 북한은 자립이라는 명분으로 1인 독재 공고화와 국제적 고립을 택했다. 북한에게도 기회는 분명히 있었다. 김일성은 1984년 초 선전 특구를 방문해 ‘천지개벽’이란 말로 중국식 개혁개방에 호의를 표했다. 중국은 1978년 선전을 포함한 11개의 특구를 지정해 점(点)→선(線)→면(面) 방식의 단계적인 개혁개방을 실행 중이었다. 김일성은 선전을 다녀오고 난 뒤에 합영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외국인과 북한 국영기업 간 합작에 관한 법률로,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한 개혁조치도 없이 김칫국부터 마신 셈이다.
당시 김일성은 선전의 발전상에 놀라워했지만, 중국식 단계적 개방을 북한에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는 언론에 기고한 글에서 이에 관한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준 적이 있다. “과거 북한을 방문할 때마다 북한 인사들에게 “옆집(중국)에 좋은 선생님이 있는데 왜 벤치마킹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대답은 한결같았다. 북한은 종심(縱深)이 작아서 중국처럼 할 수 없다고 한다. 남포와 원산을 개방하면 평양도 개방할 수밖에 없어서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면 무슨 대안이 있느냐고 반문하면 ‘우리 식대로 간다. 장군님이 다 알아서한다’는 답변이 돌아와 토론이 지속되지 않았다”
북한이 개혁개방을 택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경제적 절박함의 부족이었다. 당시 북한의 상황은 오늘날과는 매우 달랐다. 국제사회로부터 경제 제재를 받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냉전 시대의 혜택을 고루 누렸다. 광물 자원이 풍부하고 과학기술이 발달한 북한은 사회주의 진영의 핵심이었다. 이에 비해 베트남은 1979년 2월 중월전쟁(中越戰爭)으로 가장 중요한 교역국이자 원조국을 잃었다. 미국은 1975년 베트남전쟁이 종식되자마자 베트남에 경제제재를 가했다. 1980년 초중반엔 동유럽들도 베트남과의 교역 및 원조를 사실상 중단했다. 폴란드 등 동유럽의 베트남 우방들은 민주화 물결에 휘말리며 그야말로 제 코가 석자인 상황이었다. 급기야 1989년엔 해체 위기에 몰려 있던 소련마저 베트남에 대한 원조를 끊었다. 석유, 철, 비료 등 국가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물자를 사회주의 우방에 의존해왔던 베트남은 사면초가의 상황에 놓였다.
베트남은 개혁개방 없이는 공산당 1당 지배체제조차 지켜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양국이 각각의 사정에 따라 1980년대 후반에 내린 결정은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냈다. 베트남은 1992년부터 1997년 글로벌 경제위기 직전까지 연 평균 9%에 육박하는 GDP 성장률을 달성했다. 북한이 맞닥뜨린 상황은 궤멸적이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국제적 고립으로 성장률이 정체된 데다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대기근이 북한 전역을 휩쓸었다. 1995~1998년까지 이어진 ‘고난의 행군’은 지상낙원이라고 선전해왔던 북한의 ‘프로파간다’를 한순간에 허위로 만들었다. 사회주의 진영 내 우등생의 지위도 베트남에 넘겨줘야했다.
‘고난의 행군’ 시절과 관련해 북한과 베트남 간 일화는 양국의 지위가 어떻게 역전됐는지를 잘 보여준다. 당시 북한은 베트남전쟁 시절 공군을 파견했던 은혜를 마치 차용증처럼 생각해 베트남에 쌀 등 식량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미국과 막 관계 개선을 꾀하고 있던 베트남은 북한의 요구를 거절했다. 1995년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던 시절, 북한은 1차 핵위기를 일으키며 미국 등 국제사회를 자극했다. 2000년경 북한을 방문한 한 노동계 인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북한 초청으로 노동계 등 45명의 인사들이 정부 승인 하에 방북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북한직총 간부가 베트남에 대해 한 말이 지금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싸가지 없는 민족이라고 말하더군요”
2000년 들어서도 베트남과 북한은 정반대의 길로 갔다. 1995년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에 가입함으로써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첫 활동을 시작한 베트남은 2007년엔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다. 전쟁을 치렀던 미국과는 정치, 경제적 관계를 완벽하게 복원했다. 미국은 1994년 2월 대베트남 경제제재 조치를 해제했고, 1995년 7월엔 베트남과 국교를 정상화시켰다. 이어 2000년 7월 베트남-미국 양자무역협정이 체결됐고, 2000년 11월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을 공식 방문했다. 2005년 6월 판 반 카이(Phan Van Khai) 총리는 베트남전 이후 베트남의 정상급 인사로서는 최초로 미국을 방문해 양국 정상 간 공동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전쟁의 기억을 모두 털어냈다.
김정일은 2001년 1월 15일부터 5박 6일 동안 중국 서부 해안가 경제 개혁개방 특구의 상징인 상하이(上海) 푸둥지구 등 첨단 산업 금융도시를 방문해 다시 한번 ‘천지개벽’ 발언을 했다. 약 반 년 전인 2000년 5월 당시 주룽지 중국 총리가 김정일과 단독 면담 뒤 조심스럽게 개방을 권유한 뒤의 일이다. 김씨 부자(父子)는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천지개벽할 정도로 변했다”는 말로 감탄을 쏟아냈지만, 평양에 돌아가기만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립과 핵무기 개발로 돌아갔다. 김정일이 2002~2003년에 야심차게 추진한 경제개혁은 생산성을 높이는데 실패했고, 인민에게 인플레이션이란 고통만 안겼다.
김정일은 김일성이 그랬듯이 김씨 일가의 독재를 유지하는 데에만 골몰했다. 중국은 여전히 석유와 식량을 북한에 지원했다. 2000년 들어서 또 하나의 수혈원이 등장했다. 바로 남한이었다.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교류협력은 새로운 단계로 도약했다. 2000년 8월 9일 남쪽의 현대 아산과 북쪽의 아태, 민경련간 ‘개성공업지구건설운영에 관한 합의서’가 체결됐다. 개성공단은 2004년 시범 생산을 시작으로 2010년엔 입주기업 생산액이 10억달러를 돌파했다. ‘남부인(Southerner)의 역할’에 관해선 베트남과 북한의 체제 이행 연구와 관련해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다. 베트남의 경우 남베트남인들의 경험은 시장경제로의 이행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호찌민(옛 사이공)의 개방성을 신뢰했다. 북한 역시 한국으로부터 시장경제의 경험을 전수받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남부인의 역할’은 베트남의 그것과는 달랐다.
베트남은 처절하게 밑바닥까지 떨어진 뒤에 시장경제를 받아들였다. 중국이 점, 선, 면 방식으로 단계적인 변화로 체제 안정을 유지했다면, 베트남은 완충 장치도 없이 시장경제로 직진했다. 베트남이 이룬 성과는 사회주의 국가들 중 유일무이하다고 할 수 있다. 약소국이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성장을 동시에 달성한 사례다. 호치민 주석 이래 베트남이 공고하게 구축한 집단지도체제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최근 CNN발(發) 북한 급변 시나리오가 한반도의 긴장을 높이고 있다. 일본 유력 매체들은 김여정이 김정은 유고시 전권을 쥘 것이라고 보도할 정도다. 아직 정확한 사실이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김정은 사망에 따른 후폭풍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을 몰고 올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 무역전쟁에 이어 ‘코로나19 전쟁’까지 치르고 있는 터라 북한 급변은 동북아시아 정세에 ‘블랙스완 효과(극단적으로 예외적이어서 발생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 일단 발생하면 엄청난 충격과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사건)’를 가져 올 가능성이 높다. 무엇이 됐건 북한의 진정한 변화를 위한 거위의 날개짓이 되길 기대해본다.
박동휘 하노이 특파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