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 ETN·ETF '투자경보'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유가 급락 큰 손실 우려
금융감독원이 대규모 투자손실이 우려되는 원유선물 연계 상품에 대해 재차 최고 수준의 소비자경보를 발령했다.
금감원은 23일 서부텍사스원유(WTI) 선물을 기초자산으로 삼은 상장지수증권(ETN)과 상장지수펀드(ETF)에 대해 “투자 시 큰 손실이 우려된다”며 최고 수준인 ‘위험’ 등급의 소비자경보를 긴급 발령했다.
ETN과 ETF는 특정 테마의 주식 또는 상품을 묶어서 만든 지수의 움직임에 연동해 수익이 나도록 설계된 상품이다. 앞서 금감원은 지난 9일 WTI 원유선물 연계 ETN 상품에 위험 경보를 발령했다. 하지만 WTI 5월 인도분 가격이 사상 최초로 마이너스로 떨어진 상황에서도 투자 수요가 계속 몰리자 이번엔 ETF를 포함한 모든 원유선물 연계 상품으로 경보를 확대했다. 지난달 이후 개인투자자의 원유선물 ETN·ETF 순매수 규모는 약 2조5000억원에 이른다.
금감원이 소비자경보를 발령한 것은 유가 급락으로 관련 상품의 실제가치(순자산가치)가 낮아졌지만 시장가격(주가)은 그보다 훨씬 높아 향후 조정 시 큰 투자 손실을 볼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주가와 순자산가치 간 차이를 나타내는 괴리율은 원유선물 ETN의 경우 지난 22일 1044%까지 상승했다. 비교적 안정적인 흐름을 보이던 ETF도 42.4%로 치솟았다.투기장 된 원유 ETN시장…'깡통 경보'에도 제동 장치가 없다
지난 22일 ‘신한 레버리지 WTI 원유 선물 상장지수증권(ETN)’ 가격은 이론대로라면 하한가(-60%)로 직행했어야 했다. 6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원유(WTI) 가격이 42% 급락해 유가 등락률의 두 배로 움직이는 이 ETN의 기초자산인 지표가치가 87% 폭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28.18% 떨어지는 데 그쳤다. 증권사가 매도 물량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발행사인 신한금융투자는 1억 주를 쥐고 있었지만 한국거래소 유동성공급자(LP) 규정상 한 주도 팔 수 없었다.
2014년 도입된 ETN이 변동성 장세에서 제도적 허점을 드러내고 있다. 자칫 원유 레버리지 ETN 시가총액 4365억원(4개 종목)이 순식간에 증발할 위기에 놓였다. 투기 성향이 강한 한국에서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레버리지 상품을 지나치게 많이 상장시킨 게 화를 부르고 있다는 지적이다.
구멍 뚫린 ‘레버리지 ETN’
23일 신한 삼성 미래에셋 NH 등 원유 레버리지 ETN 네 종목은 가격 왜곡으로 이날 모두 거래정지 상태였다. 22일(현지시간) 6월 인도분 WTI가 19.1% 올라 지표가치가 다소 상승했지만 괴리율(시장가격/지표가치)은 여전히 최대 1249%(삼성)에 이른다.
시장에선 이번주 ETN 대규모 추가 상장으로 비정상적인 가격이 잡힐 것으로 기대했다. 신한금융투자는 21일 ‘신한 레버리지 WTI 원유 선물 ETN’ 2억 주를 신규 상장했다. 기존 상장 주식(9300만 주)의 두 배가 넘는 규모였다. 21일 하한가(-60%) 수준인 500원대에서 절반인 1억 주가량을 쏟아부었다. 하한가로 만들어야 비교적 지표가치에 근접한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장 막판 투기 수요가 몰려 905원(-38.85%)에 마감했다. WTI 가격이 42% 폭락한 22일에는 손을 쓸 수도 없었다. 거래소 업무 규정에선 LP증권사가 괴리율을 6% 이내로 축소시키는 매매만 허용하고 있는데 당시 하한가 가격이 지표가치의 600%여서 매도할 수 없었다.
ETN 지표가격이 ‘제로(0)’가 나올 수 있다는 가정을 하지 못하고 제도를 수립해 곳곳에서 구멍이 뚫리고 있다. 거래소는 거래정지, 단일가매매 등의 수단으로 ETN 안정화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투기 수요를 잡지 못하고 있다. 한 증권회사 관계자는 “모든 규정이 정상적인 상황을 가정하고 만들어져 지표가격 관련 ETN 상장폐지 규정도 모호한 상태”며 “괴리율이 커져서 거래정지를 시켰다가 유가가 50% 이상 폭락해 상장폐지되는 상황이 올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선 2000년대 초반 레버리지 ETN 괴리율 확대로 문제가 되자 발행사에 자진 청산 권한을 부여했다. 증권회사가 언제든지 지표가치로 ETN을 청산할 수 있다. 실제 한 달 전 유가가 급락 조짐을 보이자 씨티은행 등은 유가 등락률의 세 배로 연동되는 레버리지 ETN 상품을 자진 청산했다. 한 관계자는 “한국 증권사들은 변동성이 커져 레버리지 ETN 운용 비용이 가파르게 늘어나 손실을 보고 있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했다.
ETF 거래 80%는 레버리지·인버스
안전장치도 없이 원금 손실 위험이 큰 레버리지 상품을 지나치게 많이 출시해 투기를 조장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국에선 투기 성향을 가진 단타족들이 늘고 있다. 레버리지 상품 거래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 이를 보여준다. ‘KODEX 레버리지’ 거래량은 ‘KODEX 200’보다 여섯 배 많다. ETN 거래량 상위 5위 종목도 모두 레버리지 상품이다. 지난달 ETF 하루 평균 거래액(6조8572억원)에서 레버리지와 인버스 상품 비중은 81.4%(5조5806억원)를 차지했다.
미국 등 해외에서 ETF는 장기 투자 상품에 속한다. 전체 ETF 거래량 중 레버리지·인버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13% 수준이다. 미국 ETF 투자자들의 평균 보유 기간은 278일이다. 180일 이상 장기 투자하는 ETF 상품 비중도 전체의 60%를 차지한다. 김수정 SK증권 연구원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주요 운용사에 레버리지 및 인버스 상품 출시를 자제해 달라고 요구했다”며 “블랙록, 뱅가드, 스테이트스트리트 등 3대 운용사는 이미 레버리지 상품을 거의 운용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들 3사는 레버리지·인버스 ETF 판매 중단을 선언했다.
오형주/조진형/설지연 기자 ohj@hankyung.com
금감원은 23일 서부텍사스원유(WTI) 선물을 기초자산으로 삼은 상장지수증권(ETN)과 상장지수펀드(ETF)에 대해 “투자 시 큰 손실이 우려된다”며 최고 수준인 ‘위험’ 등급의 소비자경보를 긴급 발령했다.
ETN과 ETF는 특정 테마의 주식 또는 상품을 묶어서 만든 지수의 움직임에 연동해 수익이 나도록 설계된 상품이다. 앞서 금감원은 지난 9일 WTI 원유선물 연계 ETN 상품에 위험 경보를 발령했다. 하지만 WTI 5월 인도분 가격이 사상 최초로 마이너스로 떨어진 상황에서도 투자 수요가 계속 몰리자 이번엔 ETF를 포함한 모든 원유선물 연계 상품으로 경보를 확대했다. 지난달 이후 개인투자자의 원유선물 ETN·ETF 순매수 규모는 약 2조5000억원에 이른다.
금감원이 소비자경보를 발령한 것은 유가 급락으로 관련 상품의 실제가치(순자산가치)가 낮아졌지만 시장가격(주가)은 그보다 훨씬 높아 향후 조정 시 큰 투자 손실을 볼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주가와 순자산가치 간 차이를 나타내는 괴리율은 원유선물 ETN의 경우 지난 22일 1044%까지 상승했다. 비교적 안정적인 흐름을 보이던 ETF도 42.4%로 치솟았다.투기장 된 원유 ETN시장…'깡통 경보'에도 제동 장치가 없다
지난 22일 ‘신한 레버리지 WTI 원유 선물 상장지수증권(ETN)’ 가격은 이론대로라면 하한가(-60%)로 직행했어야 했다. 6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원유(WTI) 가격이 42% 급락해 유가 등락률의 두 배로 움직이는 이 ETN의 기초자산인 지표가치가 87% 폭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28.18% 떨어지는 데 그쳤다. 증권사가 매도 물량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발행사인 신한금융투자는 1억 주를 쥐고 있었지만 한국거래소 유동성공급자(LP) 규정상 한 주도 팔 수 없었다.
2014년 도입된 ETN이 변동성 장세에서 제도적 허점을 드러내고 있다. 자칫 원유 레버리지 ETN 시가총액 4365억원(4개 종목)이 순식간에 증발할 위기에 놓였다. 투기 성향이 강한 한국에서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레버리지 상품을 지나치게 많이 상장시킨 게 화를 부르고 있다는 지적이다.
구멍 뚫린 ‘레버리지 ETN’
23일 신한 삼성 미래에셋 NH 등 원유 레버리지 ETN 네 종목은 가격 왜곡으로 이날 모두 거래정지 상태였다. 22일(현지시간) 6월 인도분 WTI가 19.1% 올라 지표가치가 다소 상승했지만 괴리율(시장가격/지표가치)은 여전히 최대 1249%(삼성)에 이른다.
시장에선 이번주 ETN 대규모 추가 상장으로 비정상적인 가격이 잡힐 것으로 기대했다. 신한금융투자는 21일 ‘신한 레버리지 WTI 원유 선물 ETN’ 2억 주를 신규 상장했다. 기존 상장 주식(9300만 주)의 두 배가 넘는 규모였다. 21일 하한가(-60%) 수준인 500원대에서 절반인 1억 주가량을 쏟아부었다. 하한가로 만들어야 비교적 지표가치에 근접한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장 막판 투기 수요가 몰려 905원(-38.85%)에 마감했다. WTI 가격이 42% 폭락한 22일에는 손을 쓸 수도 없었다. 거래소 업무 규정에선 LP증권사가 괴리율을 6% 이내로 축소시키는 매매만 허용하고 있는데 당시 하한가 가격이 지표가치의 600%여서 매도할 수 없었다.
ETN 지표가격이 ‘제로(0)’가 나올 수 있다는 가정을 하지 못하고 제도를 수립해 곳곳에서 구멍이 뚫리고 있다. 거래소는 거래정지, 단일가매매 등의 수단으로 ETN 안정화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투기 수요를 잡지 못하고 있다. 한 증권회사 관계자는 “모든 규정이 정상적인 상황을 가정하고 만들어져 지표가격 관련 ETN 상장폐지 규정도 모호한 상태”며 “괴리율이 커져서 거래정지를 시켰다가 유가가 50% 이상 폭락해 상장폐지되는 상황이 올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선 2000년대 초반 레버리지 ETN 괴리율 확대로 문제가 되자 발행사에 자진 청산 권한을 부여했다. 증권회사가 언제든지 지표가치로 ETN을 청산할 수 있다. 실제 한 달 전 유가가 급락 조짐을 보이자 씨티은행 등은 유가 등락률의 세 배로 연동되는 레버리지 ETN 상품을 자진 청산했다. 한 관계자는 “한국 증권사들은 변동성이 커져 레버리지 ETN 운용 비용이 가파르게 늘어나 손실을 보고 있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했다.
ETF 거래 80%는 레버리지·인버스
안전장치도 없이 원금 손실 위험이 큰 레버리지 상품을 지나치게 많이 출시해 투기를 조장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국에선 투기 성향을 가진 단타족들이 늘고 있다. 레버리지 상품 거래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 이를 보여준다. ‘KODEX 레버리지’ 거래량은 ‘KODEX 200’보다 여섯 배 많다. ETN 거래량 상위 5위 종목도 모두 레버리지 상품이다. 지난달 ETF 하루 평균 거래액(6조8572억원)에서 레버리지와 인버스 상품 비중은 81.4%(5조5806억원)를 차지했다.
미국 등 해외에서 ETF는 장기 투자 상품에 속한다. 전체 ETF 거래량 중 레버리지·인버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13% 수준이다. 미국 ETF 투자자들의 평균 보유 기간은 278일이다. 180일 이상 장기 투자하는 ETF 상품 비중도 전체의 60%를 차지한다. 김수정 SK증권 연구원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주요 운용사에 레버리지 및 인버스 상품 출시를 자제해 달라고 요구했다”며 “블랙록, 뱅가드, 스테이트스트리트 등 3대 운용사는 이미 레버리지 상품을 거의 운용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들 3사는 레버리지·인버스 ETF 판매 중단을 선언했다.
오형주/조진형/설지연 기자 o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