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역빙자 집회금지령도 한몫…"질병 공포로 시위 잠재웠다"
봉쇄령 항의로 바통터치?…온라인 시위·상징물 퍼포먼스 속출
코로나19에 들불같던 홍콩·칠레·레바논 반정부시위 전격 진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로 확산하면서 지난해부터 홍콩과 중동, 중남미에서 몇 달씩 이어진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자취를 감췄다.

뉴욕타임스(NYT)는 23일(현지시간) 코로나19 확산 공포에 수백만 시위대가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으며, 마스크와 식품 수급 문제 때문에 부패와 권력 남용에 대한 논쟁이 무뎌졌다고 보도했다.

대다수 정부는 표면적으로 공중보건을 이유로 대중 집회를 제한하고 있으며, 일부는 이번 사태를 권력 기반을 다지거나 반대 세력을 체포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홍콩은 코로나19의 영향을 일찍부터 체감한 곳이다.

홍콩에서는 지난 1월부터 중국에서 시작된 바이러스에 대한 소식이 퍼졌고, 지난달에는 4인 이상이 모이는 집회에 대한 금지령이 내려졌다.

홍콩 경찰은 이후 이를 근거로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시위에 참여한 참가자를 체포하기 시작했다.

지난 18일에는 범죄 피의자를 중국 본토로 인도하는 법안(송환법)에 반대하는 시위에 관여한 혐의로 범민주 진영 인사들이 무더기로 체포됐다.

홍콩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당국에 체포된 활동가 맥스 청은 "공포를 조장하려는 정부의 계획"이라며 "다시 시위가 시작될 때가 되면 점점 더 적은 사람들이 참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때가 되면 당연히 또 다른 시위를 조직하겠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민주화 시위의 주역인 데모시스토당의 이삭 청 부주석도 "휴지기일 뿐, 시위가 끝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코로나19에 들불같던 홍콩·칠레·레바논 반정부시위 전격 진화
다른 지역도 최근 들어 시위 열기가 주춤한 상황이다.

알제리에서는 정부가 시위 금지 조치를 내건 이후, 시위대가 바이러스와의 싸움에 집중하기로 합의하면서 1년 이상 이어진 거리 시위가 지난달 중단됐다.

또 레바논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시위에 나섰던 시민들도 정부의 전국적인 봉쇄령에 따라 흩어졌으며, 보안군은 이때를 틈타 시위대가 진을 치고 있던 곳을 철거했다.

'반(反) 무슬림법'으로 불리는 시민권법 개정안과 관련한 시위가 벌어진 인도에서는 지도부가 봉쇄령 기간에도 시위를 이어가겠다고 밝히자 내부에서부터 반발이 일었다.

여기에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이슬람 사원에서의 집단 감염 사태로 인도에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파됐다고 지적하며 종교 간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인도의 활동가인 사미아 칸은 "현 정권은 운이 좋다"며 "유행병을 핑계로 (모디 총리) 당선 이후 가장 큰 난관을 봉합했다"고 비난했다.

클레멍 볼 유엔 집회와 결사의 자유 특별보고관은 "최근 집회의 권리를 충분히 행사할 수 있는 나라를 보지 못했다"면서 "바이러스에 대한 시위대의 공포가 집회 제한 조치를 받아들이거나 수용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19에 들불같던 홍콩·칠레·레바논 반정부시위 전격 진화
반면 사그라들었던 시위가 오히려 코로나19 사태를 기점으로 새로운 시위로 옮겨붙는 모습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해 프랑스와 페루, 이라크, 레바논 등에서는 봉쇄령이 경제생활과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다며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묻는 시위가 벌어졌다.

다만 시위대는 집회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을 따르는 등 전에 볼 수 없었던 창의적인 시위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지난해 임금 인상과 공적 자금 지원을 외치는 대규모 파업이 벌어졌던 콜롬비아에서는 '빨간 천' 시위가 벌어졌다.

재택근무 조치로 일자리를 잃은 빈민들이 창문에 구조 신호로 빨간 티셔츠를 내걸기 시작했는데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이에 참여하면서 또 하나의 시위 수단으로 변모했다.

또 홍콩에서는 닌텐도의 비디오게임 '모여봐요 동물의 숲'이 시위대의 새로운 활동 거점으로 떠올랐다.

검열을 받지 않는 게임 공간 속에서 다른 사용자들에게 송환법 반대 메시지를 알리는 방식이다.

코로나19에 들불같던 홍콩·칠레·레바논 반정부시위 전격 진화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에서는 마스크를 쓴 2천여명의 시위대가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규탄하는 시위를 열었다.

지난해 지하철 요금 문제를 기점으로 사회제도 전반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 터져 나왔던 칠레에서는 시위 동력을 온라인으로 가져가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NYT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나타난 새로운 시위가 이전의 시위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하더라고, 향후 시위에 큰 힘을 실어줄 수 있다고 전망했다.

특히 세계적인 경기 침체가 장기화할 경우 지금 누적된 시민들의 분노를 원동력으로 시위가 벌어질 수 있다.

이미 홍콩에서는 신규 감염이 일주일 이상 한 자릿수에서 맴돌면서 다시 시위 조직 준비가 진행 중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