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미술 공부한 늦깎이 화가
회화에 잘 쓰이지 않는 마커로
정밀하게 묘사하는 그림 창안
'마커 아트' 근작 등 28점 선봬
다시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건 10년도 훨씬 지나서였다. 목표는 미대 진학. 독학으로 수능을 준비했다. 집이 있는 예산에서 서울 홍익대 앞 미술학원까지 날마다 자동차, 기차, 지하철을 갈아타고 다니면서 실기를 공부했다.
3전4기로 들어간 곳이 고려대 미술학부. 공부 열정이 활활 타올랐다. 서양화를 전공하면서 서양사를 부전공으로 공부했다. 2005년 고려대를 졸업한 뒤엔 사법고시를 봐서 판사가 되겠다며 연세대 법대에 진학해 졸업했고, 지난해엔 홍익대 대학원(회화과)을 수료했다.
판사의 꿈은 접었지만 붓은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지난 27일부터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 한경갤러리에서 초대전을 열고 있는 서양화가 양옥경 씨(54) 이야기다.
“어렵게 살았지만 꿈을 놓지는 않았어요. 서울에서 공부하느라 주말부부로 살면서도 힘든 줄 몰랐어요. 항상 ‘오늘 살고 말 것처럼’ 최선을 다했습니다.”
2009년 첫 개인전을 연 이후 43회의 개인전, 60여 회의 그룹전 및 국내외 아트페어 참가는 그가 얼마나 분투했는지 보여주는 기록이다. 양씨는 2004년 대한민국미술문화대상전 특선을 시작으로 창작미술협회전, 정수대전, KBS자연미술대전, 구상전, 신사임당미술대전, 2015년 광복 70주년 기념 대한민국미술대전 등에서 수상했다. 영국 덴마크 쿠웨이트 네덜란드 등 10여 곳의 해외 한국대사관과 영사관,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뮤지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왕실 등 국내외 다양한 곳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이번 전시회에 ‘My Galaxy, Under the Galaxy’를 주제로 양씨가 창안한 마커화 24점과 유화 4점 등 28점을 걸었다. 마커 아트(marker art)는 디자인 작업에 주로 사용되던 마커로 판화지, 닥종이, 한지, 실크 등에 꽃과 여인, 나비, 고양이, 사자, 말, 잉어, 새 등을 그린 작품이다.
양씨는 색이 300개를 넘는 일본 코픽사의 마커 중 250가지 이상을 사용해 화려하고 화사한 꽃의 이미지부터 동물의 털, 여인의 머리카락 등 정밀한 부분까지 묘사해낸다. 작업 과정은 길고 복잡하다. 닥종이나 실크에 호분과 아교를 바른 뒤 연필로 스케치한다. 거기에 펜으로 다시 스케치한 다음 연필은 지우고 호분과 아교를 한 번 더 바르고 마커로 색을 칠한다.
꽃과 동물을 묘사해 화려해 보이는 양씨의 작업에는 은유와 암시가 깔려 있다. 꽃을 비롯한 개체들은 각각 독립된 우주인 동시에 다른 것과 어우러져 또 다른 우주를 상징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현실 세계는 홀로그램의 간섭무늬처럼 무질서한 환영(幻影)이며, 더 깊은 차원에는 모든 사물과 물리적 세계를 만들어내는 본질적 차원의 현실이 존재한다는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의 ‘홀로그램 우주론’에 바탕한 은유와 암시다.
예컨대 그의 ‘빅 데이터(Big Data)’ 시리즈에 등장하는 나체 여인의 긴 머리카락은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 격인 머리와 세상의 수많은 존재를 연결하는 네트워크다. 인간과 자연, 우주가 하나가 되는 조화와 부조화, 동질적인 것과 이질적인 것을 한 화면에 담았다. ‘빅 데이터-The Love’에서는 머리카락의 굴곡과 끝에 수많은 하트(♡)를 숨은 그림처럼 새겨놨다. ‘반짝이는 게 모두 금은 아니다’ 시리즈는 캔버스에 유화물감을 바른 뒤 순금 가루를 뿌려 고정시킨 작품. 화면 밖에는 반짝이를 뿌려 진짜와 가짜의 모호한 경계를 은유했다.
양씨는 영어에도 능통해 런던 뉴욕 파리 홍콩 등의 해외 아트페어에 직접 참가하며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올해도 런던 스타트아트페어(9월), 마이애미 스코프아트페어(12월) 등의 참가가 확정됐다. 양씨는 “해외에서 마커 아트의 반응이 좋다”며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때 인간과 꽃, 동물 등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의미를 우주적 차원에서 생각해보며 위안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시는 다음달 21일까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