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러 봐도 울어 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日서 녹음 직전 비보 듣고 통곡하며 불러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 자욕양이친부대(子欲養而親不待).’ 《명심보감》에도 나오는 공자(BC 551~479) 말씀이다. ‘나무는 가만히 서 있으려 해도 바람이 흔들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려 해도 부모는 이미 돌아가셔서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1940년 진방남이 부른 ‘불효자는 웁니다’를 들을 때 연상되는 글귀다. 어버이날(5월 8일) 무렵이면 가슴속에 꼼실거리는 유행가다.

‘불러봐도 울어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원통해 불러보고 땅을 치며 통곡해요/다시 못 올 어머니여 불초한 이 자식은/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가사 일부)

이 노래는 진방남의 데뷔곡인데 눈물겨운 사연이 담겨 있다. 1940년 한국에는 녹음 시설이 없었다. 그래서 음반 취입을 위해 태평레코드사 전속으로 신카나리아 등과 함께 일본 오사카에 갔는데, 녹음 스튜디오에 들어서려는 순간 어머니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진방남은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노래를 불렀다. 그후 그는 ‘항상 모자라고 못나서 채울 것이 많다’는 생각으로 반달이란 의미의 반야월(半夜月)을 예명으로 사용했다.

이 곡은 1~2절 사이 중간 대사가 애절하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고 했습니다만, 아무런 기약도 없이 부모님 곁을 떠났던 그 가슴 아픈 추억이 어제인 것처럼 눈에 선합니다. 그것이 정말, 30년 전인가요, 50년 전인가요. 북망산(중국 허난성 뤄양시 북쪽, 한나라 이후 왕과 귀인들의 무덤이 많은 곳으로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의 대명사) 가시는 길 그리도 급하셔서, 이국에 우는 자식 나 몰라 하고 가셨나요.’

당시 23세였던 본명 박창오, 진방남은 1917년 마산에서 태어나 진해농산학교를 졸업하고 양복점 재단사 보조로 일하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1939년 김천콩쿠르대회에서 ‘불탄 잔디 속잎 나는/그리운 봄 돌아왔네/먼 산 먼동 안개 속에/도화꽃도 피었는데~’라는 ‘춘몽’을 불러 데뷔했다.

그는 이름이 많다. 박창오 진방남 반야월 추미림 박남포 허구 등. 그는 박시춘, 이난영과 함께 한국 가요계의 3대 보물로 불리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2012년 95세를 일기로 타계했는데 작고 5일 전까지 창작을 하다가 떠나간 우리 유행가의 전설이다.

1940년을 전후해 한국에 가수는 많았는데 왜 녹음 기술이 없었을까. ‘불효자는 웁니다’를 녹음한 곳이 일본이었음을 생각하면 이런 의문이 든다. 그때 한반도는 일본제국주의의 부(府)였다. 그들은 조선반도를 소비시장화하고 자원은 본국으로 반출해 갔다. 음반 녹음 기술을 한국에 전래한 사람은 1884년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앨런(1858~1932)이다. 그 뒤 녹음 기술자가 고종(1852~1919) 앞에서 명창 박춘재 노래를 취입했다. 노래가 끝난 뒤 녹음기 속에서 박춘재의 소리가 울려 나오자 고종은 깜짝 놀라며 “춘재, 네 명(命)이 10년은 감하였겠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녹음기가 사람의 정기(精氣)를 다 빼앗아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불러 봐도 울어 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日서 녹음 직전 비보 듣고 통곡하며 불러
한국에서 처음 발매한 음반은 1908년 빅타레코드에서 취입한 김창환의 ‘춘향전’과 박팔괘의 ‘가야금 연주’란다. 이런 기술 발전의 계기가 1910~1945년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압제 터널 속에 갇히게 됐다. ‘불효자는 웁니다’도 그런 시절에 탄생한 유행가다.

유차영 < 한국콜마 전무·여주아카데미 운영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