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19세기 말~20세기 중반까지 일제 식민통치의 터널 속에서 치욕적인 시대를 살았다. 1876년 강화도조약에서부터 1945년 광복까지 70년, 한국 근대사라고 하는 기간이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피폐한 현실을 견뎌낼 수 있게 한 여러 저력 중에 통속적인 가사와 가락을 얽은 유행가가 차지한 에너지를 그 누가 감히 폄훼(貶毁)할 수 있으랴. ‘번지 없는 주막’, 이 노래가 그런 에너지의 옹달샘이었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궂은 비 나리 던 그 밤이 애절쿠려/ 능수버들 태질 허는 창살에 기대어/ 어느 날짜 오시겠소 울든 사람아// 아주까리 초롱 밑에 마주 앉아서/ 따르는 이별주는 불같은 정이었소.’(가사 일부)

노랫말 속의 주막(酒幕)은 탄막(炭幕)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후 조령원, 동화원 등 관아(官衙)에서 설치한 원(院)의 기능이 쇠퇴하고, 쉬어가는 참(站)마다 참점(站店·역참에 딸린 주막)을 설치해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했다. 이때 보부상이나 행상 같은, 이곳저곳을 다니며 장사하는 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이들을 위한 주점과 주막이 덩달아 발전했다. 19세기 후반에는 촌락 10∼20리 사이에 1개소 이상의 주막이 있었는데 주로 장시(場市)가 열리는 곳이나 역(驛)·나루터·광산촌 등에 있었다. 춘추시대 제나라에서 친구 포숙아의 추천으로 재상이 된 관중이 경제정책을 추진하면서, 30리마다 이동 상인들의 접대기관인 객잔(客棧)을 설치해 상거래를 활성화한 점에서 착안한 시책이다.

그 시절 주막에서는 술이나 밥을 사 먹으면 보통 음식값 외에는 숙박료를 따로 받지 않아 숙객에게 침구를 제공하지 않았으며, 한두 칸의 온돌방에서 10여 명이 혼숙했다. 그래서 옛날에 먼 길을 나서는 행객들은 괴나리봇짐 속에 홑이불 한 자락을 돌돌 말아서 짊어지고 다녔다. 주막은 여염집과 별반 다를 바 없었으나, 나그네들이 자는 방은 주막에서 가장 큰 방으로 봉놋방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 마지막으로 남은 주막은 예천에 있는 삼강주막(三江酒幕)인데 내성천·금천·낙동강 세 물줄기가 모이는 곳이라고 해서 삼강이라고 하며, 김해에서 올라와 하회마을까지 가는 길목이고, 문경새재를 넘어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꼭 지나쳐야 하는 곳이었다. 마지막 주모는 안주인 유옥연 할머니이며, 19세부터 2005년 90세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70년 동안 삼강주막을 지켰다.

‘번지 없는 주막’은 1961년 강찬우 감독, 김승호·박암·도금봉 출연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한동안 밀수 배에 가담해 왔던 주인공은 스스로의 죄를 뉘우치고 자수해 감옥형을 살고 나온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내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밀수에 다시 가담한다. 그래서 아내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했지만, 그는 그가 다시 배반할 것을 염려한 일당들에 의해 죽고 만다.’ 이 기구한 사연의 장면 중간에 ‘번지 없는 주막’이 흐른다.

유행가의 주인공은 대중이고, 그 대중은 우리 민족이다. 이런 면에서 유행가는 그 노래가 탄생한 그 당시의 감성으로 불러야 한다. ‘번지 없는 주막’은 우리 민족의 대(對)일본 저항심을 품고 있는 저항 노래다. 오래 흘러온 노래는 오래 불린다.

유차영 < 한국콜마 전무·여주아카데미 운영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