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융합
10여 년 전 서울대가 신설한 융합대학원 원장으로 갑자기 임명됐다. 정확히 말하면 대학원 추진단이 먼저 생겼고 교수, 학생을 뽑고 나서 몇 달 뒤에 정식 개원했다. 불과 두 달 만에 공간, 예산, 직원 채용과 같은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기적과 같은 시절이었다. 이제는 수십 명의 교수, 수백 명의 재학생, 수백억원의 연구비를 확보한 중견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융합이란 무엇인지 개념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나노, 바이오, 정보기술, 인지과학의 결합을 융합으로 정의했는데 과학기술에 국한한 융합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는 듯싶었다. 그 유명한 스티브 잡스의 명언 “기술과 인문학(liberal arts)의 만남”에서 보듯이 융합은 뚝 떨어진 영역끼리 서로 자극할 때 효과가 극대화되므로 대학원은 정보기술, 나노, 바이오과학과 함께 인문학, 사회과학을 포용하는 극히 큰 그릇으로 융합의 터전을 새롭게 정의했다.

‘We Innovate’와 같은 슬로건 아래 융합을 쉽고 빠르게 실현할 방안을 구상했는데, 첫 번째는 공간 구성에 무작위성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기존 대학에선 학과별로, 혹은 연구실별로 구성원이 같은 공간에 모여 있어 다른 분야의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게 된다. 하지만 무작위성을 도입해 교수나 학생이 상주하는 자리를 랜덤하게 지정하면 다른 전공 연구자와의 대화가 풍부해지고 자연스럽게 융합 연구도 활성화된다. 이 방식은 최근 대학원뿐 아니라 스타트업과 첨단기업에서 채택해 많은 효과를 보고 있다.

두 번째는 매년 자신의 실적과 공헌을 기록하고 평가받게 했는데, 한국 교수사회에는 조금 생소한 방식이었다. 특히 다른 전공자와의 융합 연구에 대한 기여도를 강조했던 기억이 난다.

융합은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한 분야가 늘 해오던 방식대로 하지 않고 다른 분야의 방식을 도입해 큰 효과를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인공지능(AI), 빅데이터와 융합해 이런 변신과 혁신을 이루고 있는 분야는 수없이 많다. 자율주행 자동차, 신약 개발, 농작물 재배, 상품 판매 및 유통, 교육, 의료, 국방, 금융, 공장자동화, 스마트시티는 AI 도입으로 기존의 한계를 뛰어넘어 거대한 블루오션을 창출하고 있다.

그러나 융합은 쉽지 않다. 많은 실패 사례도 있다. 대부분 너무 쉽게 융합에 접근했기 때문이다. 최고 전문가끼리의 융합만이 최고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특히 AI와의 융합은 융합하려는 분야의 고도 전문지식이 바탕이 돼야 한다. 다양한 분야(X)가 AI와 결합하는 ‘X+AI’ 형태의 융합으로 가기 위해선 대학의 학과 간 장벽을 크게 낮추는 것이 특히 필요하다.

4차 산업혁명, 바이오혁명, AI는 같은 개념을 시대적으로 다르게 부르는 것뿐이다. 핵심은 하나, 올바른 융합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