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에 떠밀려 '벼락 입법'…후유증 키우는 국회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n번방 방지법 논란 확산
여야, 입법예고·공청회도 '패스'
20일 본회의서 처리 합의
n번방 방지법 논란 확산
여야, 입법예고·공청회도 '패스'
20일 본회의서 처리 합의
여야 원내대표가 오는 20일 열리는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n번방 사태’ 관련 후속 법안을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청소년과 여성을 대상으로 한 악질적인 범죄 재발을 막자는 게 입법 취지다. 하지만 법조계와 인터넷업계 안팎에선 이 후속 법안들이 여론과 시간에 쫓겨 당초 취지에서 거리가 멀어진 이른바 ‘보여주기식’ 입법으로 변질됐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숙의 없는 ‘n번방’ 후속 법안
n번방 사태와 관련한 대표 후속 법안인 방송통신발전기본법·정보통신망법은 3월 4일에, 전기통신사업법은 이달 4일 각각 발의됐다. 이들 법안은 지난 7일 과학정보방송통신위원회를 통과했다. 국회법상 명시된 10일 이상의 입법예고도 하지 않았고, 수석전문위원의 검토 보고서도 없었다. 법안 상정 전 전문가 의견을 듣는 공청회도 생략돼 최소한의 형식적·절차적 요건조차 지키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이 같은 절차적 문제를 떠나 이들 법안이 성착취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 처벌이나 재발 방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까지 나온다. n번방 사태는 해외에 서버를 두고 있는 텔레그램을 통해 발생한 사건이지만 후속 법안 개정으로도 해당 업체를 처벌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 텔레그램 같은 해외 서비스는 국내법의 집행력이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네이버·카카오 등 국내 업체에 대한 감시 규정만 강화되는 역차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은 지난 7일 과방위 전체회의에서 해외 사업자 규제에 대해 “법 규정보다 집행 가능성의 문제”라며 법안의 한계를 사실상 인정했다.
n번방 사태와 관련 없는 내용이 후속 법안에 포함된 정황도 확인됐다.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돼 온 ‘끼워 넣기’ 입법 행태다. 이번 방송통신발전기본법 개정안에는 갑자기 민간 인터넷데이터센터(IDC) 사업자를 재난관리 대상에 지정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n번방 사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데다 정부에서조차 준비 부족을 이유로 난색을 보였지만, 과방위 일부 의원이 처리 강행을 밀어붙인 것으로 전해졌다.
“입법 과정부터 신중해야”
20대 국회에선 민식이법(도로교통법과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타다금지법(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안), 군소음법(군용비행장·군사격장 소음 방지 및 피해 보상에 관한 법률안) 등의 법안이 발의된 지 2~3개월 만에 처리됐다. 입법 취지와 상관없이 짧은 숙의 기간 때문에 사회 각계에서 과잉 입법이란 논란이 일고 있는 법들이다.
민식이법은 스쿨존 내 13세 미만 어린이를 보호한다는 선의의 입법 취지와는 달리 운전자 과실 규정이 모호하고 처벌 강도가 과도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단순 과실에 의한 교통사고라고 해도 3년 이상 징역형 또는 무기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어 운전자들의 불안감이 크다.
타다금지법은 국민의 편의나 신산업 확산에 대한 고려 없이 택시산업 이익 보호에만 초점이 맞춰졌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군소음법은 군 공항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민사 소송 없이 소음 피해 보상을 받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법이 시행되면서 보상금액이 훨씬 줄고 부동산 규제가 심해질 수 있어 졸속 법안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짧은 기간 만들어진 법안들이 이 같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음에도 더불어민주당에서는 21대 총선 공약으로 내놓은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통과 기간을 단축시킬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최장 330일인 기간을 105일로 줄이겠다는 것이다. 여당이 177석을 차지한 상황에서 기간 단축은 법안 일방 처리 등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김민호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은 일단 만들어지면 없애거나 개정하기 힘들다”며 “잘못된 법에 대한 피해는 전적으로 국민이 보기 때문에 입법 과정에서 신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동훈/김주완 기자 leedh@hankyung.com
숙의 없는 ‘n번방’ 후속 법안
n번방 사태와 관련한 대표 후속 법안인 방송통신발전기본법·정보통신망법은 3월 4일에, 전기통신사업법은 이달 4일 각각 발의됐다. 이들 법안은 지난 7일 과학정보방송통신위원회를 통과했다. 국회법상 명시된 10일 이상의 입법예고도 하지 않았고, 수석전문위원의 검토 보고서도 없었다. 법안 상정 전 전문가 의견을 듣는 공청회도 생략돼 최소한의 형식적·절차적 요건조차 지키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이 같은 절차적 문제를 떠나 이들 법안이 성착취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 처벌이나 재발 방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까지 나온다. n번방 사태는 해외에 서버를 두고 있는 텔레그램을 통해 발생한 사건이지만 후속 법안 개정으로도 해당 업체를 처벌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 텔레그램 같은 해외 서비스는 국내법의 집행력이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네이버·카카오 등 국내 업체에 대한 감시 규정만 강화되는 역차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은 지난 7일 과방위 전체회의에서 해외 사업자 규제에 대해 “법 규정보다 집행 가능성의 문제”라며 법안의 한계를 사실상 인정했다.
n번방 사태와 관련 없는 내용이 후속 법안에 포함된 정황도 확인됐다.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돼 온 ‘끼워 넣기’ 입법 행태다. 이번 방송통신발전기본법 개정안에는 갑자기 민간 인터넷데이터센터(IDC) 사업자를 재난관리 대상에 지정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n번방 사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데다 정부에서조차 준비 부족을 이유로 난색을 보였지만, 과방위 일부 의원이 처리 강행을 밀어붙인 것으로 전해졌다.
“입법 과정부터 신중해야”
20대 국회에선 민식이법(도로교통법과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타다금지법(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안), 군소음법(군용비행장·군사격장 소음 방지 및 피해 보상에 관한 법률안) 등의 법안이 발의된 지 2~3개월 만에 처리됐다. 입법 취지와 상관없이 짧은 숙의 기간 때문에 사회 각계에서 과잉 입법이란 논란이 일고 있는 법들이다.
민식이법은 스쿨존 내 13세 미만 어린이를 보호한다는 선의의 입법 취지와는 달리 운전자 과실 규정이 모호하고 처벌 강도가 과도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단순 과실에 의한 교통사고라고 해도 3년 이상 징역형 또는 무기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어 운전자들의 불안감이 크다.
타다금지법은 국민의 편의나 신산업 확산에 대한 고려 없이 택시산업 이익 보호에만 초점이 맞춰졌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군소음법은 군 공항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민사 소송 없이 소음 피해 보상을 받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법이 시행되면서 보상금액이 훨씬 줄고 부동산 규제가 심해질 수 있어 졸속 법안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짧은 기간 만들어진 법안들이 이 같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음에도 더불어민주당에서는 21대 총선 공약으로 내놓은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통과 기간을 단축시킬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최장 330일인 기간을 105일로 줄이겠다는 것이다. 여당이 177석을 차지한 상황에서 기간 단축은 법안 일방 처리 등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김민호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은 일단 만들어지면 없애거나 개정하기 힘들다”며 “잘못된 법에 대한 피해는 전적으로 국민이 보기 때문에 입법 과정에서 신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동훈/김주완 기자 lee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