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민주당의 적은 '어제의 민주당'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송강호의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라는 한마디는 올 초 유행어였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 넉 달 만에 거의 잊혀지고 대신 사람들은 마이크 타이슨의 명언을 떠올린다. “누구나 다 계획이 있다. 한방 얻어맞기 전까진.”

불과 얼마 전까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연임을 의심하는 관측은 거의 없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최장기 집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종신 집권도 거의 기정사실로 여겨졌다. ‘시황제’로 불리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권력 구도에는 실금조차 안 보였다. 그들은 다 계획이 있는 듯했다. 그러나 코로나는 이를 비웃듯 스트롱맨들의 권력 아성을 마구 흔들어댄다.

그런 코로나가 한국에는 거꾸로 영향을 미쳤다. 지난 3년간 경제 붕괴로 고전하던 정권을 코로나가 별안간 ‘구세주’로 둔갑시켰다. 4년차 대통령이 레임덕은커녕 ‘마이티 덕’이 됐고, 더불어민주당은 180석(현재는 177석) ‘슈퍼 여당’으로 거듭난 것이다. 코로나 쇼크가 재정건전성의 마지노선(국가부채 비율 40% 선)까지 허문 덕에 ‘전 국민’이란 수식어만 붙이면 어떤 퍼주기 정책도 못할 게 없다. 국민도 원한다. 야당이 아무리 포퓰리즘이니 연성(軟性) 전체주의니 비난해도 소용없다.

하지만 코로나는 결코 만만한 놈이 아니다. 방심으로 배양돼 자만으로 퍼져나간다. 그 위력을 우습게 본 나라에는 반드시 대가를 요구한다. 코로나 경제 위기는 곧 정권의 기회이자 위기다. 잘하면 ‘요술방망이’도 되고, 잘못하면 ‘몽둥이’도 된다. 그렇기에 지금은 대통령도, 거대 여당도 아닌 ‘코로나의 시간’이다. 코로나가 거대 여당을 만들어 놓고 실력을 테스트하고 있는 것이다.

곧 출범할 21대 국회에서 집권 여당의 책무는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하다. 그래선지 경제 문제에 관한 한 여당 내에서 전에 없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기존 반(反)시장·반기업 이미지를 희석시킬 만한 인사가 대거 국회에 입성하게 된 때문일 것이다. 38년간 변함없는 수도권 입지 규제를 완화하자(이용우), 구글처럼 대기업의 벤처 투자를 허용하자(이광재), 기업을 적대시해선 안 된다(양향자), 수축사회를 팽창사회로 바꿔야 한다(홍성국)….

여당 의원·당선자들의 공부 모임도 전례 없이 활발하다. 분야도 경제·외교·복지·그린뉴딜·혁신·미래 아젠다 등을 총망라한다. 보수야당이 내걸 만한 아젠다까지 공론장으로 끌어오고 공부도 열심히 한다면 재집권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의 문제는 민주당 자체에 있다. 오랫동안 이념 편향과 규제 만능주의 관성에 발목이 잡혀 있는 탓이다. 실질보다 명분을 앞세우고, 정부가 시장을 통제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사고의 유연성을 방해한다. 당장 원격진료만 해도 청와대·정부와 달리 민주당은 ‘의료민영화’ 프레임에 갇혀 있다. 수도권 규제는 균형발전과 충돌하고, 대기업 벤처 투자는 금과옥조로 여기는 금산분리·재벌 특혜론과 부딪친다.

이뿐인가. 소비 절벽을 걱정하는 판에 총선 공약으로 복합쇼핑몰 규제를 내걸었다. 재택근무와 공장자동화가 가속화하는데도 획일적 근로시간 규제 등 친노조 기조는 요지부동이다. 설상가상 기업 활동을 구속할 상법·공정거래법 개정안을 21대 국회에서 재추진하겠다고 한다. 미증유의 위기 앞에도 전례 답습이다.

민주당 주류인 86그룹의 가장 큰 단점은 가슴만 뜨거운 게 아니라 머리까지 뜨겁고, 시장과 기업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는 것이다. 기업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규제입법 한두 건이 아니라 무소불위의 거대 여당이 돼서도 달라진 게 없음을 확인하는 순간의 실망감일 것이다.

초선들의 주장이 상당 부분 당론과 배치되는데 과연 당 주류의 생각까지 바꿀 수 있을까. ‘올드 민주당’이 과연 ‘뉴 민주당’으로 변신할 수 있을까. 위기 극복에 필요하면 경제정책을 우클릭할 용기가 있을까.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민주당의 가장 큰 위협이자 적(敵)은 미래통합당이 아니라 ‘어제까지의 민주당’이다. 빌 클린턴의 미국 민주당, 토니 블레어의 영국 노동당처럼 한국의 민주당이 변신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