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유내강형 합리주의자…입법부 수장 오르는 박병석(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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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전반기 국회의장 후보로 추대된 더불어민주당 박병석 의원은 여야를 아우르는 통합의 리더십을 자랑하는 관록의 정치인이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대전 서구갑에 출마, 당선된 뒤 같은 지역에서만 내리 6선을 하는 무패 기록을 세웠다.
21대 여야를 통틀어 국회 최다선이다.
박 의원은 중앙일보 기자 출신으로, 국민의 정부 출범 직후인 1998년 국민회의 수석부대변인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외환위기 시절에는 당정의 일원으로 경제정책 조정에 관여해 당시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다.
1999년에는 고건 서울시장 시절 정무부시장을 지냈다.
총선 출마를 위해 부시장직을 사퇴하려 했을 때, 당시 고건 전 시장이 크게 만류했다는 후문이다.
국회 입성 직후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어 새천년민주당의 대변인을 맡으라고 통보를 했다는 일화도 있다.
16대 시절에만 국회와 지역구를 오가기 위해 기차를 700번 이상 타는 등 기자 시절 때처럼 현장을 발로 뛰며 민심을 듣는 부지런함과 꼼꼼함도 정평이 나 있다.
17대에는 열린우리당 신행정수도 건설위원장과 기획위원장을 맡아 충청권의 가장 큰 정치적 이슈였던 행정수도 문제에 관여해 존재감을 높였다.
18대 총선에선 민주당 후보 가운데 유일하게 대전 지역에서 당선돼 생환하는 뚝심을 보여주기도 했다.
2012년 19대 국회 전반기에는 국회 부의장을 맡았다.
국회의장에는 '삼수' 끝에 오르는 셈이다.
20대 국회 전반기 의장 경선에는 정세균·문희상 후보에 이어 3위에 머물렀고, 후반기 경선에는 문희상 후보에게 패해 고배를 마셨다.
세 번째 도전에선 김진표(5선) 의원과 양자구도가 형성됐지만, 선수가 낮은 김 의원이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함에 따라 '합의추대'라는 평화적 방식으로 입법 수장을 꿰차게 됐다.
박 의원은 20일 페이스북을 통해 "국회의 문을 상시로 열고 국민이 필요할 때 즉각 응답해야 한다"며 "'메이드 인 코리아'가 신뢰의 표상으로 거듭나는 시점에서 우리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여야를 초월한 국회의 소통이 핵심 동력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2017년 대선에선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아 문재인 대통령 당선에 힘을 보탰다.
여야에서 두루 신망이 높은 그가 여대야소 양당제로 회귀한 21대 국회에서 극한 충돌을 피해갈 운영의 묘를 발휘할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국회 한중의회외교포럼 회장을 지낸 대표적 '중국통'이다.
2017년 문 대통령 취임 직후 중국특사로 활약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과 접견해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로 골이 깊어진 양국의 관계 회복에 물꼬를 트기도 했다.
홍콩특파원 시절에는 유창한 중국어 실력을 토대로 중국 톈안먼(天安門) 사태를 취재하면서 자오쯔양(趙紫陽) 실각을 단독 보도했다.
당시 반정부 시위가 한창이던 베이징(北京)에서는 무력 진압 가능성이 커 대부분의 특파원이 철수했지만, 박 의원은 회사 측이 "돌아오지 않으면 해고하겠다"는 만류에도 자리를 지켜 세계적인 특종을 낚았고, 1989년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대전고 시절에 만난 부인 한명희(68) 씨와 금실이 좋은 것으로 유명하다.
부인 사이에 2남.
▲ 대전(68) ▲ 대전고 ▲ 성균관대 법학과 ▲ 16, 17, 18, 19, 20대 국회의원 ▲ 중앙일보 경제부장(부국장) ▲ 서울시 정무부시장 ▲ 새천년민주당 대변인 ▲ 열린우리당 신행정수도 건설위원장, 기획위원장 ▲ 열린우리당 대전시당 위원장 ▲ 국회 정무위원장 ▲ 국회 부의장 ▲ 국회 한중의회외교포럼 대표
/연합뉴스
2000년 16대 총선에서 대전 서구갑에 출마, 당선된 뒤 같은 지역에서만 내리 6선을 하는 무패 기록을 세웠다.
21대 여야를 통틀어 국회 최다선이다.
박 의원은 중앙일보 기자 출신으로, 국민의 정부 출범 직후인 1998년 국민회의 수석부대변인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외환위기 시절에는 당정의 일원으로 경제정책 조정에 관여해 당시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다.
1999년에는 고건 서울시장 시절 정무부시장을 지냈다.
총선 출마를 위해 부시장직을 사퇴하려 했을 때, 당시 고건 전 시장이 크게 만류했다는 후문이다.
국회 입성 직후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어 새천년민주당의 대변인을 맡으라고 통보를 했다는 일화도 있다.
16대 시절에만 국회와 지역구를 오가기 위해 기차를 700번 이상 타는 등 기자 시절 때처럼 현장을 발로 뛰며 민심을 듣는 부지런함과 꼼꼼함도 정평이 나 있다.
17대에는 열린우리당 신행정수도 건설위원장과 기획위원장을 맡아 충청권의 가장 큰 정치적 이슈였던 행정수도 문제에 관여해 존재감을 높였다.
18대 총선에선 민주당 후보 가운데 유일하게 대전 지역에서 당선돼 생환하는 뚝심을 보여주기도 했다.
2012년 19대 국회 전반기에는 국회 부의장을 맡았다.
국회의장에는 '삼수' 끝에 오르는 셈이다.
20대 국회 전반기 의장 경선에는 정세균·문희상 후보에 이어 3위에 머물렀고, 후반기 경선에는 문희상 후보에게 패해 고배를 마셨다.
세 번째 도전에선 김진표(5선) 의원과 양자구도가 형성됐지만, 선수가 낮은 김 의원이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함에 따라 '합의추대'라는 평화적 방식으로 입법 수장을 꿰차게 됐다.
박 의원은 20일 페이스북을 통해 "국회의 문을 상시로 열고 국민이 필요할 때 즉각 응답해야 한다"며 "'메이드 인 코리아'가 신뢰의 표상으로 거듭나는 시점에서 우리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여야를 초월한 국회의 소통이 핵심 동력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2017년 대선에선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아 문재인 대통령 당선에 힘을 보탰다.
여야에서 두루 신망이 높은 그가 여대야소 양당제로 회귀한 21대 국회에서 극한 충돌을 피해갈 운영의 묘를 발휘할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국회 한중의회외교포럼 회장을 지낸 대표적 '중국통'이다.
2017년 문 대통령 취임 직후 중국특사로 활약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과 접견해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로 골이 깊어진 양국의 관계 회복에 물꼬를 트기도 했다.
홍콩특파원 시절에는 유창한 중국어 실력을 토대로 중국 톈안먼(天安門) 사태를 취재하면서 자오쯔양(趙紫陽) 실각을 단독 보도했다.
당시 반정부 시위가 한창이던 베이징(北京)에서는 무력 진압 가능성이 커 대부분의 특파원이 철수했지만, 박 의원은 회사 측이 "돌아오지 않으면 해고하겠다"는 만류에도 자리를 지켜 세계적인 특종을 낚았고, 1989년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대전고 시절에 만난 부인 한명희(68) 씨와 금실이 좋은 것으로 유명하다.
부인 사이에 2남.
▲ 대전(68) ▲ 대전고 ▲ 성균관대 법학과 ▲ 16, 17, 18, 19, 20대 국회의원 ▲ 중앙일보 경제부장(부국장) ▲ 서울시 정무부시장 ▲ 새천년민주당 대변인 ▲ 열린우리당 신행정수도 건설위원장, 기획위원장 ▲ 열린우리당 대전시당 위원장 ▲ 국회 정무위원장 ▲ 국회 부의장 ▲ 국회 한중의회외교포럼 대표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