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美·中 충돌, 한국에 시간 벌어줄까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기디언 래크먼은 저서 《아시아화(Easternization)》에서 그레이엄 앨리슨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주장한 ‘투키디데스 함정’(기존 패권국과 신흥강국 간 파괴적 충돌) 개념을 끌어들인다. ‘미국과 중국은 투키디데스 함정을 피할 수 있을까’가 향후 수십 년간 세계질서를 규정하는 질문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미·중 충돌이 격화되는 조짐이다. 이대로 가면 미·중 충돌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키워드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무슨 대비를 하고 있는가.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3주년 연설문에 미·중 충돌 얘기는 없다. 문 대통령은 “선도형 경제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개척하겠다”고 했다. “한국을 ‘첨단산업의 세계공장’으로 만들겠다”고도 했다. 비전은 얼마든지 제시할 수 있지만, 포스트 코로나가 미·중 충돌로 빨려 들어가면 그땐 어찌되는가.

일각에서는 미·중 충돌이 한국에 반사이익을 가져다 주거나 ‘중국의 굴기’를 늦춰 한국에 시간을 벌어줄 것이란 가설을 내놓는다. 과연 그럴까. 로이터통신은 미국이 ‘경제 번영 네트워크’란 이름의 친미(親美) 경제 블록을 짜고 있다고 전했다. 만약 경제 블록이 ‘미국 중심’과 ‘중국 중심’으로 갈라지고 한국이 선택을 강요당하는 순간이 오면 어찌되는가. 미국을 선택해도 무역의존도가 높은 한국으로서는 상당한 타격이 불가피할 것이다.

중국 중심 공급망이 붕괴하는 시나리오가 더해지면 계산이 달라질 수 있다. 문제는 이 시나리오의 가능성이다. 미국과 동맹 또는 동맹에 준하는 관계를 맺은 국가와 중국이 최대 무역 파트너인 국가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많을까. 후자 쪽이 두 배 정도 된다. 중국을 경계한다는 것과 중국을 경제적으로 필요로 한다는 것은 다른 얘기다.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이 중국과 거래를 중단할 수 있을까.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이 중국과 관계를 단절할 수 있을까. 미국이 동맹 중심의 경제 블록을 짜도 중국이 바로 무너진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한국이 미·중 충돌로 중국의 굴기 지연 등 반사이익을 기대한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일지 모른다. 미국이 동맹국들에 화웨이의 5G(5세대) 통신장비를 사용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는데도 먹혀들지 않고 있다. 미국이 반도체 공급을 차단한다지만, 그럴수록 중국의 국산화 의지는 강해지는 분위기다.

미국의 경제 리더십은 중국이 취약한 ‘혁신 선도력’에서 나온다. 하지만 연구개발투자에서 미국은 정체 상태다. 중국이 미국을 거의 따라잡았거나 추월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이 현재 기술에서 중국의 접근 차단에 몰두하다 미래 기술에서 우위를 빼앗기는 시나리오도 불가능한 게 아니다. 그게 양자컴퓨팅 같은 분야라면 충격파가 클 것이다. 중국과 관계를 끊을 수 있다는 미국도 운명의 전환점에 선 것은 마찬가지다.

한국으로서는 미·중으로부터 선택을 강요당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 이런 협상력을 가지려면 걸맞은 실력이 있어야 한다. 불행히도 미·중과의 경제적 분업관계로만 따져도 그 행운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으로 돌아갈 공산이 크다.

코로나 사태는 언젠가 끝나겠지만 수십 년 갈 미·중 충돌은 다르다. 어느 쪽도 편들지 않는 ‘전략적 모호성’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독수리와 용 사이에서’ 논문으로 유명한 존 아이켄베리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이 ‘고도의 헤징 전략’을 펴야 한다고 했다. 외교만이 아니다. 한국이 운신의 폭을 넓히려면 미국보다, 중국보다 빠른 혁신으로 양 강대국이 손잡고 싶어 하는 핵심기술 등 전략자산을 많이 확보하는 수밖에 없다.

강대국 사이에 끼인 것을 샌드위치라고 하지만, 없어서는 안 될 샌드위치라면 글로벌 분업구도상 축복이다. 서글픈 신세는 샌드위치가 아니라 ‘낙동강 오리알’로 전락하는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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