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명품 시계의 본고장 격인 스위스. 강소국 스위스를 먹여 살리는 품목 중 대표적인 것이 시계다. 하지만 스위스의 럭셔리 시계산업이 요즘 그야말로 삼재를 겪고 있다. ‘롤렉스와 스와치의 나라’ 스위스에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코로나로 행사 취소·공장 중단
첫 번째 액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를 직격탄으로 맞았다. 최근 스위스 민간은행 폰토벨이 낸 시계산업 보고서는 “올해 스위스의 시계산업은 지난 50년 동안 가장 큰 매출 감소를 경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올해 예상 수출량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22%)보다 더 떨어진 -25%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시계업체 500여곳을 회원사로 둔 시계산업연합회 역시 “코로나19 여파로 지난 3월 수출액이 14억 스위스프랑(약 1조7835억원)을 기록해 지난해 동기 대비 20% 이상 하락했다”면서 “앞으로 더 악화할 것”이라고 최근 밝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3월 개최 예정이었던 세계 최대 명품 시계·보석 박람회인 바젤월드가 코로나19 여파로 취소됐다. 정부의 대규모 실내행사 금지 정책 때문이다. 바젤월드가 끝나자마자 열릴 계획이었던 또다른 고가 시계 박람회인 워치스앤원더스 제네바도 무산됐다. 이들은 글로벌 럭셔리 시계 행사의 양대산맥으로 꼽힌다.
사실 고급 시계는 오프라인 행사가 중요하다. 직접 눈으로 보고 차봐야 하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시계 박람회는 시계 브랜드들이 수억원을 호가하는 한정판 초고가 시계를 앞다퉈 선보이는 축제의 장이다. 전세계 셀러 및 판매점을 비롯해 큰손들이 모이고 현장 구매도 활발하게 이뤄진다. 그 해의 수출량 및 시계 트렌드도 결정된다.
하지만 스위스 정부는 지난 3월 중순부터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대대적인 봉쇄 조치를 시행했다. 이에 따라 롤렉스를 비롯한 파텍필립, 오데마르 피게, 위블로, 태그호이어 등 고급 시계업체의 생산시설도 멈춰섰다. 오메가, 브레게, 론진, 티쏘, 블랑팡 등 시계 브랜드 20개를 보유한 스와치그룹 역시 조업시간을 단축했다. 전반적인 출고량이 확 줄었다. 롤렉스는 올해 출시 예정이었던 모델들을 연기한 상태다. 다행히 지난 15일부터 인접국과의 국경을 다시 여는 등 스위스 내 경제 활동은 서서히 정상화되고 있다. 브라이틀링은 직원들 간 확산을 막기 위해 생산설비의 절반만 가동 중이다. 스와치 그룹 역시 “전세계 유통망의 80%가 여전히 폐쇄된 상태이기 때문에 향후 2~3개월 동안 순차적으로 생산량을 조절하겠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계업계의 전망은 여전히 부정적이다. 스위스에서 만드는 시계의 95%가 전세계로 수출되기 때문이다. 시계산업이 휘청이면서 스위스 경제까지 타격을 받고 있다.
○진격의 스마트워치…애플의 공습
두 번째 시련. 세계인을 매료시킨 스마트워치에 당해낼 재간이 없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인 스트래티지 애널리틱스(SA)에 따르면 지난해 애플 스마트워치인 애플워치의 판매량이 전체 스위스 시계의 판매량을 넘어섰다. 처음 있는 일이다. 관련 업계에선 ‘스위스 시계의 굴욕’이라고 할 정도였다.
애플워치는 작년 3070만대가 출하돼 전년보다 36% 성장했다. 반면 스와치 티쏘 롤렉스 태그호이어 등 스위스 시계 브랜드의 출하량 총합은 2110만대에 그쳤다. 이는 전년 대비 13% 줄은 것이다. 2018년엔 스위스 시계산업의 출하량이 2420만대, 애플워치가 2250만대였다. 2015년 4월 첫 선을 보인 애플워치는 단숨에 전세계 시계시장을 평정했다. 일찌감치 스마트워치를 출시했던 삼성전자나 소니, LG전자 등에 비해 한참 늦은 출발이었으나 애플이 차별화한 전략을 앞세운 게 통했다.
사람들은 애플워치를 ‘가성비 뛰어난 똑똑한 시계’로 받아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애플워치엔 용두(태엽을 감는 꼭지)가 달려 고급 시계 같다. 디스플레이를 활용해 개성 따라 페이스도 바꿀 수 있다. 본체의 재질은 알루미늄, 스테인리스 스틸 등 다양하고 시계줄 옵션도 매력적이다. 나이키 에르메스 등과 손잡은 콜라보 제품도 인기다.
시계의 모습이지만 전자기기로서의 성능은 점점 업그레이드 되고 있다. 긴급 구조 요청 보내기, 심전도 측정 등 헬스케어 기능이 대폭 보완됐다. ‘운동할 때 쓸 만 하다’는 입소문도 탔다. 애플워치에서 작동 가능한 앱은 2만여개가 넘는다. 그만큼 추가할 수 있는 기능이 많다. 가격도 아날로그 시계보다 꽤 저렴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스마트워치 시장은 점점 더 커질 전망이다. SA는 “애플이 젊은 소비자들에게 어필하고 더 나은 제품을 꾸준히 내놓으면서 전통적인 스위스 럭셔리 시계업체들이 설 곳을 잃고 있다”고 분석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최대 시장 홍콩서 시위로 타격
마지막 액운. 범죄인 인도법에 반대하며 지난해 홍콩을 뒤흔들었던 민주화 요구 시위다. 6개월 이상 이어진 이 대규모 시위가 왜 스위스의 럭셔리 시계산업까지 타격을 줬을까.
전세계 주요 관광지인 홍콩은 스위스 시계가 가장 많이 팔리는 중요한 시장이다. 홍콩은 부가가치세가 낮아 수익률도 높다. 중국 소비자들과의 접점 역할도 하고 있어 사실상 홍콩은 스위스 시계업계의 최대 시장이다. 전세계 수출 중 홍콩의 비중은 12.3%를 차지한다.
하지만 스위스시계산업연합회에 따르면 시위 영향으로 지난해 홍콩에 대한 수출액은 전년보다 11% 급감했다. 1984년 이후 최악의 실적을 기록한 셈이라고 블룸버그통신은 분석했다. ‘고급시계 시장의 큰손’인 중국인들의 구입이 줄었기 때문이다.
홍콩 시위의 여파는 기업 실적에도 반영됐다. 스와치그룹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10억2000만스위스프랑(1조3002억원)이었다. 이는 전년 대비 11% 감소한 것이다. 회사 측은 올해도 홍콩 시장에서 매출 감소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한다.
코로나19로 한동안 잠잠해졌던 홍콩의 시위는 최근 들어 재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다음달부터 톄안먼 민주화 사태 31주기(6월4일), 반중 시위 1주년(6월9일), 홍콩 반환 23주년(7월1일) 등 역사적인 기념일이 몰려 있기 때문이다. 시계업계는 홍콩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스마트폰 보급으로 아날로그 시계의 시대가 갔다고들 하지만 스위스 시계는 명품으로 포지셔닝하면서 틈새를 개척했고 잘 살아남았다.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 본연의 기능은 희미해졌지만 럭셔리 제품으로서 위상은 더 높아진 셈이다. 스위스의 명품 시계들은 이 악재들을 잘 버틸 수 있을까. 건투를 빈다.
김정은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