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기업을 꺾고 싶어? 그럼 그 회사를 사버려…M&A는 '지옥의 레이싱'
“제임스 본드는 포드를 몰지 않습니다. 한물갔으니까요.”

1960년대 미국 포드 본사, 마케팅 임원인 리 아이아코카(존 번탈 분)는 회장 헨리 포드 2세(트레이시 레츠 분) 앞에서 이렇게 프레젠테이션(PT)한다. 그는 “젊은 세대는 부모님이 운전하던 포드가 아닌, 빠르고 섹시한 페라리를 원한다”며 “카 레이싱(경주)을 시작해야 하는 이유”라고 선언한다. 헨리 포드 2세는 “한 달에 우리의 하루 생산량도 못 만드는 회사를 따라가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 아이아코카가 답한다. “‘차의 의미’ 때문이죠. 포드 배지가 승리를 의미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헨리 포드 2세의 눈이 번뜩인다.

포드는 왜 페라리 인수에 나섰나

저 기업을 꺾고 싶어? 그럼 그 회사를 사버려…M&A는 '지옥의 레이싱'
영화 ‘포드 V 페라리’는 1960년대 자동차시장을 배경으로 두 기업 간 승부의 세계를 그린 영화다. 글로벌 자동차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카 레이싱 대회의 인기도 덩달아 하늘을 찌를 때였다. 1900년대 초중반 호황을 뒤로한 채 내리막을 걷던 포드는 이미지 변신을 위해 카 레이싱에 뛰어든다.

이탈리아의 페라리는 카 레이싱 업계에서 독보적인 선두이자 글로벌 1위 스포츠카 생산업체였다. 1960~1965년 ‘지옥의 레이스’라고 불리던 ‘르망24’(24시간 연속 레이스) 우승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차 개발에 지나치게 많은 예산을 투입한 탓에 자금난을 겪고 있었다. 포드는 페라리와의 인수합병(M&A)을 시도한다. 주머니 사정이 어려운 페라리에도 매력적인 제안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창업자 엔초 페라리(레모 기론 분)는 협상장에서 아이아코카에게 독설을 퍼붓는다. “못생기고 작은 차를 만드는 큰 공장에 돌아가서 회장에게 전해라. 넌 헨리 포드가 아니라 ‘2세’라고.” 헨리 포드 2세도 격분한다. “얼마가 들든 페라리를 박살내라”고 지시한다. 포드는 미국인 중 유일한 르망24 우승자였던 자동차 디자이너 캐롤 셸비(맷 데이먼 분)를 고용한다. 셸비는 지병 때문에 더 이상 차를 몰 수 없었다. 성격은 괴팍하지만 레이싱 실력만은 최고였던 자동차 정비공 켄 마일스(크리스천 베일 분)를 대신 불러들인다.

포드는 왜 굴욕을 감수하고 인수를 먼저 제안했을까. 페라리 같은 수준의 차를 직접 개발하기 위해 들여야 하는 시간과 비용을 아낄 수 있어서다. 기업은 M&A를 통해 자사에 없는 생산 시설, 판로, 인력, 브랜드 등 경영 자원을 한번에 얻을 수 있다. 높은 진입 장벽을 곧바로 넘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유행이 빠르게 변하는 산업에서 기업에 시간은 ‘금’이다. 페이스북이 2012년 10억달러를 들여 인스타그램을 인수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트렌드로 뜨고 있는 사진·해시태그 중심 서비스를 개발해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보다 이미 성공 단계에 진입한 회사를 사들이는 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저 기업을 꺾고 싶어? 그럼 그 회사를 사버려…M&A는 '지옥의 레이싱'
‘시간 프리미엄’만큼 인수 가격에도 ‘프리미엄’이 붙는다. <그림 1>과 같이 기업은 인수 후 시너지에 따른 잠재적 기업가치 상승분이 인수 가격보다 높다고 판단할 때 M&A에 나선다. 상장 기업의 경우 주가에 ‘경영권 프리미엄’을 얹어 거래하는 게 일반적이다. 포드도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인수에 나섰지만 실패한다. 카 레이싱에 대한 독자적 의사 결정권을 보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자동차 업체인 피아트가 포드 대신 페라리를 품는다. 포드는 페라리의 경영권 프리미엄을 높이는 ‘들러리’ 역할만 선 것을 알게 된다.

차별화해야 사는 독점적 경쟁 시장

셸비와 마일스는 ‘페라리보다 뛰어난 차’를 만들어야 했다. 더 가벼운 차체와 성능 좋은 엔진이 필요했다. 마일스는 차체 전체에 깃털을 붙여 달려보기도 하고, 자동차에 불이 붙는 사고를 당하면서도 의지를 꺾지 않았다. 밤낮없는 노력은 ‘GT40’라는 결과물을 내놨다. 포드의 첫 레이싱카이자 경쟁의 산물이었다. 두 기업은 왜 그렇게 치열한 대결을 벌였을까. 글로벌 자동차시장이 ‘차별화’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운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림 2>의 왼쪽 그래프는 ‘완전 경쟁 시장’의 수요-가격 곡선이다. 이 시장은 판매·구매자의 수가 무한하고 제품이 표준화됐다. 기업 진입과 퇴출이 완전히 자유롭다. 공급이 무한한 까닭에 특정 회사가 공급을 늘린다고 해도 가격에 변동을 주지 못한다. 그러니 제품 광고를 할 필요도 없다.

저 기업을 꺾고 싶어? 그럼 그 회사를 사버려…M&A는 '지옥의 레이싱'
반면 ‘독점적 경쟁 시장’은 가격에 따라 수요가 탄력적으로 변하는 시장이다. 이 시장은 △다수의 기업이 들어가 있고 △각 회사의 제품이 차별화되며 △기업 진입과 퇴출이 어느 정도 자유로운 게 특징이다. <그림 2>의 오른쪽 그래프가 독점적 경쟁 시장의 수요 곡선이다. 가격을 높이면 수요가 줄어든다. 그러나 제품의 차별화 수준이 높다면 수요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고가의 페라리에 마니아층이 꾸준히 있었던 이유다. 이런 시장에서 기업은 광고 홍보 등을 통해 이미지를 차별화하는 전략도 병행한다. 레이싱에서 페라리를 이기는 것은 포드의 명운을 건 마케팅 전략이었던 셈이다.

경쟁은 내부에도 있었다. 포드의 또 다른 임원인 레오 비브(조시 루카스 분)는 마일스를 탐탁지 않아 한다. 그는 “포드는 ‘신뢰’를 의미하는데, 마일스는 그런 이미지가 아니다”며 “‘포드스러운’ 드라이버가 필요하다”고 일침을 놓는다. 결국 포드는 다른 선수들로 팀을 꾸려 첫 레이스에 나선다. 그러나 이변 없이 페라리에 패한다. 마일스만큼 차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헨리 포드 2세는 다시 셸비와 마일스에게 기회를 준다. 르망24 전에 열리는 ‘데이토나 레이스’에서 1등을 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마일스는 보란 듯이 기회를 잡아낸다. 비브가 꾸린 팀을 제치고 선두를 따낸다. 셸비-마일스를 포함해 포드 내 총 세 팀이 르망24에 공동 출전한다.

브레이크를 밟게 한 ‘후광 효과’

르망24에서 포드는 이변을 일으킨다. 마일스는 밤낮없이 달렸고 경쟁자인 페라리의 선수는 빗길에 미끄러져 탈락하고 만다. 1~3위는 모두 포드 팀, 그중 선두는 마일스였다. 우승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비브가 또다시 훼방을 놓는다. “1~3위를 함께 결승선에 들어오게 하자”고 헨리 포드 2세를 설득한다. ‘그림이 되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헨리 포드 2세는 이를 받아들였고 셸비는 마일스에게 “원하는 선택을 하라”고 한다. 늘 그랬듯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기를 바라면서.

헨리 포드 2세는 왜 비브의 ‘밉상 제안’을 받아들였을까. 행동경제학에서는 ‘후광 효과(Halo Effect)’를 기업 마케팅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설명한다. 브랜드의 이미지가 머리에 강하게 박히면 브랜드 충성도가 높아지는 현상이다. 브랜드 이미지가 제품의 ‘후광’이 되는 것이다. 제품과 서비스의 본래 가치를 뛰어넘는 이미지를 전달해 소비자 구입을 유도하는 것이다. 판매량 급락이 고민이었던 헨리 포드 2세에게 포드의 ‘후광 효과’를 극대화하자는 제안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마일스는 울분을 토하듯 도로를 질주한다. 자신의 기록도 갈아치웠다. 그러나 우승을 코앞에 둔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 브레이크를 밟기 시작한다. 뒤처져 있던 두 차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비브의 계획대로 세 팀은 결승선을 함께 끊는다. 그러나 우승자는 마일스가 아니었다. 마일스의 출발선이 더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포드는 영화에서처럼 1966년 실제 페라리를 제치고 르망24에서 1~3위를 차지한다.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포드’가 적힌 레이싱카 세 대가 결승선을 끊는 모습은 전 세계 신문 1면을 장식했다. 마일스는 그 뒤에도 셸비와 함께 자동차 개발 테스트를 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도로 위에서 세상을 떠났다. 역사적인 기업의 승리 뒤에 역설적으로 경쟁을 포기한 개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 영화가 아니었다면 잘 알려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정소람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