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디지털 전환 통해 '新제조 한류' 키워야
한 달 전 세계적인 제조 자동화 학회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2년 뒤 열리는 학회를 한국에서 개최할 의향이 없느냐는 문의였다. 원래 호주가 차기 학회 유치를 신청했지만, 제조 관련 산업이 크게 없는 호주보다는 글로벌 제조 기업을 보유한 한국을 선호한다는 취지였다. 이처럼 학계의 위상도 그 나라의 대표 산업과 연관이 있다.

잠시 얘기를 돌려, 독일에서 시작된 ‘스마트 팩토리’의 핵심은 정보통신기술(ICT)과 공장의 결합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듯이 아무리 공장이 고도화됐다고 해도 부품 공급이 원활하지 않거나 유통이 불가능하면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다. 최첨단 공장일지라도 설계에 문제가 있거나 공정을 고려하지 않고 설계된 제품은 품질과 성능을 보장하기 어렵다.

최근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설계·생산·유통과 서비스 운영 시스템 및 데이터를 통합하고 조직과 운영 프로세스를 혁신하는 방안인 ‘제조 디지털 전환’이 제조산업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등장하고 있다. 제조의 디지털 전환이라고 하면 무인화나 자동화를 떠올리지만, 그보다는 제품이 고객에게 전달되는 전 과정의 가치 사슬인 설계·생산·유통·서비스를 디지털 기술로 연계해 제조의 새로운 혁신을 도모하자는 의미다.

디지털 제조의 효용 사례를 들어보자. 제품이 고장이 났을 때 문제의 원인이 고객의 잘못된 사용에 기인한 것인지, 생산이나 설계에 잘못이 있었는지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조직이 분절돼 있고 성과 관리도 다르다 보니 담당 부서 간 또는 기업 간 책임 떠넘기기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디지털 제조 전환을 통해 고객의 제품 사용 정보, 생산 이력, 설계 정보가 결합되면 품질의 문제가 무엇인지 효과적으로 원인을 분석할 수 있으며 해결 과정도 효율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인 대만 TSMC는 이미 디지털 전환을 진행 중이다. 반도체를 자체적으로 설계하지 않고 생산만 한다고 해서 기술력이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같은 요리법일지라도 요리사에 따라 전혀 다른 요리가 완성될 수 있다. 가족을 위한 요리법과 호텔에서 제공하기 위한 요리법은 같을 수 없다. 반도체 생산도 소량의 시제품 생산과 수천만 개 상용 제품을 생산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제품에 대한 이해와 공정 기술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사업이다.

몇 년 전부터 TSMC는 설계·기획단에서부터 고객과 함께 공정 기술을 공유해 제품을 설계할 수 있는 e파운드리를 운영하고 있다. 설계 따로, 생산 따로가 아니라 기획 단계에서 e플랫폼을 통해 작업을 함께 진행하고 이후 자사에서 생산된 제품의 유통 및 기타 서비스도 대행해 제품을 기획하고 출시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을 대폭 줄이는 서비스다.

미국 GE는 이미 몇 년 전 제조 디지털 전환의 비전을 제시했다. 주력인 제조에서 벗어나 사업 영역을 확장하다가 전략적 오판으로 그 위상이 크게 떨어졌지만 당시 GE의 디지털 전환 시도는 획기적이었다. 핵심은 ‘제조 및 유지·보수 서비스 통합 플랫폼’이었다. GE의 주력인 비행기 엔진 생산에서 나아가 비행기 엔진에 설치한 센서를 통해 들어오는 데이터를 분석해 유지·보수 서비스의 효율을 높이는 것이다. 외부에는 ‘제조업의 서비스화’로 잘 알려졌지만 핵심은 이를 가능하게 하는 디지털 전환 플랫폼이다.

제조 디지털 전환은 한국 제조산업의 또 하나의 미래이자 기회다. 앞서 학회 사례에서 언급했듯이 산업 경쟁력을 갖춘 국가는 그 나라를 대표하는 산업의 브랜드가 있다. 대한민국은 ‘제조’다. 신산업 육성에는 이런 브랜드 가치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증명됐듯이 한국은 신속한 제품의 개발·생산 및 유통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ICT 스타트업과 글로벌 브랜드를 보유한 제조 기업이 협업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지원해 ‘제조 한류’의 위상을 드높이는 전략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단순 제조에서 나아가 제품을 효과적으로 생산하고 공급할 수 있는 플랫폼과 지식 서비스를 제공하는 신제조산업 육성 전략을 제안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