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밑바닥 인생…도박장이나 털어버릴까"
서늘한 총구가 이마를 겨눴다. 죽음을 예감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과 땀으로 얼굴이 뒤범벅됐다. 웃음소리가 들렸다. “재밌네. 기회를 줄게요.” 총을 내린 ‘한(박해수 분)’이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그가 준 시간은 5분. 그 안에 최대한 멀리 도망쳐야 한다.

세 친구가 있었다. 일자리는 없고 물가는 매일 치솟는 극단적인 불황. 돈도 빽도 없는 청년들의 유일한 꿈은 ‘헬조선’ 탈출이다. 그러나 꿈을 위해 필요한 것도 돈이었다. 성실하게 일해선 구할 수 없는 액수의 돈을 마련하는 방법은 하나다. 털려도 신고하지 못할 불법 도박장을 터는 것. 법 밖의 세상이 얼마나 잔혹한지는 미처 몰랐다. 헬조선 속 청년들의 불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디폴트에 빠진 ‘디스토피아’ 한국

"어차피 밑바닥 인생…도박장이나 털어버릴까"
준석(이제훈 분)이 감옥에서 3년 만에 나오며 영화는 시작된다. 그를 마중나온 기훈(최우식 분), 장호(안재홍 분)가 차를 몰고 지나는 거리는 폐허에 가깝다. 고층 건물은 텅 비었고, 문을 닫은 상점의 내려진 셔터에는 그라피티만 가득하다. 한때 말쑥한 시민이었을 사람들은 집을 잃고 길가를 서성인다. 밤이 되면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리고, 정부와 기업을 규탄하는 시위대는 횃불을 든다.

국가가 무너진 이유는 영화 속 지나가듯 등장하는 뉴스에 나온다. “정부가 1150억달러의 부채를 상환 만기까지 갚지 못해 채무 불이행(디폴트) 상태에 빠졌습니다. 국제 채권단은 정부가 요구한 부채 탕감이 불가능하다고 못박았습니다.”

디폴트는 국가가 채권 발행 등을 통해 진 빚을 계약된 기간 안에 갚지 못해 파산한 상태를 뜻한다. 상환 기간을 뒤로 미루는 모라토리엄(채무상환 유예)과 달리 디폴트는 채무를 아예 갚을 수 없는 상황이다.

영화 속에서는 한국이 디폴트에 빠지기 전부터 원화가치가 폭락한다. 국가 신용도가 내려가면서 외국 자본이 이미 썰물처럼 빠져나갔을 터다. 외국 자본이 위험자산인 원화를 팔고 나가면서 원화가치는 바닥을 모르고 추락한다. 원·달러 환율이 폭등(원화가치 폭락)하자 은행은 환전을 금지한다. 상점들은 원화 대신 달러를 받는다. 준석이 감옥에 가기 전 금은방을 털어 숨겨놨던 돈도 휴지 조각이 됐다.

범죄도 이득과 비용 따져보는 합리적 결정

"어차피 밑바닥 인생…도박장이나 털어버릴까"
상황을 파악한 준석은 감옥 안에서 세운 인생 계획을 친구들에게 털어놓는다. 한국을 떠나 하와이를 닮은 대만의 한 섬에서 자전거 가게를 열고, 바닷가에서 낚시와 서핑이나 하며 살자는 꿈 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한국을 뜨기 위해서는 큰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달러가 쌓여 있는 불법 도박장을 털기로 했다.

하지만 경험이 없는 젊은이들의 강도 계획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도박장 주변을 대놓고 서성거리며 폐쇄회로TV(CCTV) 사진을 찍고, 군 복무 이후 잡아본 적 없는 총을 구해 사격 연습을 한다.

무모해 보이는 계획에 이들이 몸을 던진 이유를 경제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1992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게리 베커 교수는 범죄를 포함한 인간의 행동이 발생하는 이유를 경제학 이론으로 해석했다.

그에 따르면 범죄는 인간의 합리적 의사결정 결과다. 범죄를 저지르려 하는 사람은 범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기대이익을 계산한다. 훔친 돈, 심리적 만족감 등이다. 동시에 범죄로 인해 치러야 할 기대비용도 따진다. 체포되고 감옥에 가는 것이다. 범죄를 통해 얻을 기대이익이 기대비용보다 크면 평범한 사람도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가설이다.

준석 일행이 불법 도박장을 털기로 한 것도 범죄의 기대이익과 기대비용을 따진 결과다. 준석이 감옥에 있는 동안 기훈과 장호는 성실하게 살아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정직하게 일해서는 먹고살 만큼 돈을 벌 수 없었다.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훔쳐야 했고 월세를 못 내 길거리에 나앉기 직전이었다.

영화 초반, 준석의 계획을 반대하는 기훈을 향한 장호의 대사에는 이들이 생각하는 범죄의 기대이익과 기대비용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이대로 가면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어. 영원히 밑바닥 인생이야. 그런데 이번 일만 성공하면, 우리도 사람답게 살 수 있잖아. 사람답게….”

불완전 정보로 생명의 비용 몰랐다

베커의 범죄경제학은 획기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이 이론은 인간의 합리성을 전제로 하지만 인간은 때로 자신의 의도와 달리 비합리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을 간과했다. 의사결정에 꼭 필요한 정보를 현실에서는 다 모으지 못하기도 한다. 일명 ‘정보의 불완전성’이다. 이 경우 개인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결정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결정이 될 수 있다.

현실을 몰랐던 준석 일행의 어설픈 불법 도박장 털기 계획도 처음에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바로 이들은 도박장 운영 조직의 킬러로 고용된 ‘한’의 사냥감이 된다. 총 쏘는 법도 제대로 모르는 20대 청년들이 불법 영업장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털려도 신고할 수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법 밖 세상의 잔혹성과 한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만약 한의 존재를 알았다면 준석 일행은 불법 도박장 대신 달러를 보관하고 있는 은행을 털었을 것이다. 그들을 사냥하는 한에게 준석은 “경찰에 자수하고 돈도 다 돌려주겠다”고 절규한다. 범죄 기대비용에 어떤 기대이익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의 위협’이 있다는 점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유토피아 등지고 다시 한국으로

준석은 홀로 한국을 떠나는 데 성공한다. 그가 친구들에게 입이 닳도록 말했던 ‘하와이를 닮은 대만의 섬’에서의 일상은 꿈꾸던 것과 꼭 같다. 조그마한 자전거 수리점을 운영하고 바다가 정원처럼 눈앞에 펼쳐진 넓은 집에서 하루를 보낸다. 그림으로만 봤던 에메랄드빛 바다에 발도 담가 본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여전히 ‘지옥’에 있다. 함께 오지 못한 친구들의 모습이 끝없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밤이면 한이 나오는 악몽에 시달린다. 모든 것을 내주고 얻어낸 유토피아에 행복이 있을 수 없다.

결국 준석은 다시 한국으로 향한다. 돌아가는 배 안에서 그는 다짐한다. 한을 다시 찾아갈 것이며, 죽더라도 더는 도망치지 않고 싸우겠다고. 영화 내내 사회의 거대한 폭력으로부터 사냥당하던 청년이 마침내 주체가 돼 우뚝 일어서는 순간이다.

준석의 결말은 비극일지 모른다. 역설적이지만 그 속에는 희망이 있다. 공포와 무력함이 보편화돼 누구나 탈출을 꿈꾸는 사회일지라도, 개인이 남아 각자의 책임을 다해야 무언가 변화가 시작되지 않겠는가.

노유정 기자 yjr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