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활력 넘치는 호찌민…베트남 실용주의의 상징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시장경제 길라잡이
오철 교수의 신흥국이 궁금해 (8) 베트남
오철 교수의 신흥국이 궁금해 (8) 베트남
호찌민은 20세기 베트남전쟁을 승리로 이끈 베트남의 초대 국가 주석인 국부(國父)의 이름이다. 이 지도자의 이름을 딴 베트남 남단에 위치한 호찌민시(Ho Chi Minh City)는 인구 약 900만 명이 거주하는 베트남 남부의 최대 도시이다. 수도인 하노이에서 약 1700㎞ 떨어져 있다. 서울과 부산의 거리가 325㎞이니, 서울~부산 거리의 약 5배이고 비행기로만 약 2시간10분이 걸린다. 베트남은 매우 긴 나라다.
(3) 베트남 경제중심지 호찌민
베트남 국부의 이름을 딴 도시
호찌민시의 과거 이름은 사이공이고, 여전히 사이공이라는 명칭이 곳곳에 남아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뮤지컬 ‘미스 사이공’에서나, 한국의 쌀국수 음식점에도 사이공이란 명칭을 종종 쓰기 때문에 우리는 사이공이라는 명칭에 더 친숙할 수도 있다. 호찌민시 안에서도 사이공이란 이름을 현재에도 그대로 쓰는 경우도 많다. 호찌민시의 기차역 명칭도 사이공역이고 베트남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맥주의 브랜드 네임도 ‘사이공맥주’다. 그리고 호찌민시의 유명 호텔 중의 하나가 된 한국계 호텔의 명칭도 ‘롯데 레전드 호텔 사이공’이다.
호찌민시는 16세기까지는 캄보디아 영토였다가 이후 베트남이 이 도시를 포함한 주변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베트남 영토가 된다. 한참 시간이 흐른 1858년 베트남과 프랑스 간 전쟁 때 이 도시는 프랑스에 의해 점령되기도 하다가, 1862년 베트남·프랑스 전쟁의 종전 후부터 1945년까지 오랜 기간 프랑스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된다. 현재에도 호찌민시에 프랑스식 건축물과 유명 바케트집이 많은 이유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프랑스가 물러간 이후에는 남베트남의 수도가 된다.
1인당 GDP 베트남의 2배…그랩 등 공유경제도 허용
호찌민시는 수도인 하노이와 워낙 멀리 떨어져 있고, 과거에도 남베트남의 수도로써 상업이 발전했던 영향이 있어 하노이보다도 훨씬 더 경제적 활력이 있는 도시다. 맥도날드 1호점이 처음 생긴 도시이며, 곳곳에 스타벅스 매장도 베트남 어느 지역보다 많다. 또한 공유경제의 대표주자인 그랩이 한국에서는 아직 허용되지 않은 자동차 공유 사업을 하고 있다. 그랩은 호찌민시에 진출하면서 현지에 맞는 오토바이 공유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는데, 러시아워에는 이 오토바이 공유서비스가 매우 유용하다. 필자도 러시아워에 이동할 때 종종 오토바이 그랩 서비스를 이용하기도 했는데, 러시아워의 답답한 트래픽을 뚫고 제시간에 약속장소에 데려다준다.
호찌민시가 베트남의 경제 수도라는 사실은 여러 경제지표에서도 알 수 있는데, 호찌민시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베트남의 1인당 GDP보다 약 두 배나 많고, 하노이보다도 높다. 호찌민시의 여러 비즈니스 제도와 관행도 수도인 하노이와는 사뭇 다르면서 더 자유롭다. 이런 이유로 1986년 도이머이(개혁 개방)정책이 실시되면서 개방의 물결을 타고 많은 한국 기업들이 호찌민시에 특히 많이 진출했다. 나이키와 리복 등 세계적인 유명브랜드의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을 대부분 담당하는 업체도 주로 대한민국의 기업들이고, 삼성 LG 등 대기업들의 공장도 호찌민시 주변에 있다.
명분보다는 실용주의 노선 추구
지난 5월 19일은 베트남 국부 호찌민의 탄생 130주년이 되는 날이다. 호찌민은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이지만, 그의 지도노선이나 철학이 저서로 남아 있지 않아 후대에 종종 그가 공산주의자인지 민족주의자인지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호찌민은 프랑스와의 독립전쟁이 끝난 직후에 프랑스 자본의 베트남 지원을 요청했으며, 유언으로는 남베트남을 탄압하지 말라고 남겼다. 이런 사실을 볼 때 호찌민은 ‘눈앞의 명분보다는 장기적인 국가이익을 더 중시하는 실용주의자’라는 의견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남베트남을 탄압하지 말라는 호찌민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명분보다 장기적 국가이익을 중시하는 실용주의 방향은 그의 사후에도 지속적으로 견지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베트남 정부는 1975년 미국과 종전 이후 바로 적극적으로 대미(對美)수교를 추진했다. 도이머이 정책이 발표된 1986년 미국인의 비자 및 여행을 허용했으며, 미국 경제학자를 초빙했다. 또한 베트남 정부는 전쟁 당사자인 미국 및 프랑스와 수교할 때 어떤 사과나 금전적 배상금도 요구하지 않았다. 2009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취임연설에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국 군인들을 영웅으로 칭송했어도 어떤 공식적인 항의도 하지 않았다. 우리의 정서와는 맞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미국은 베트남의 최대 수출국이며, 프랑스는 베트남의 최대 우방국이고, 한국은 베트남의 최대 투자국이다. 미국, 프랑스, 대한민국 모두 20세기 베트남과 전쟁한 국가다. 미국과의 20세기의 치열한 전쟁에 대해서 미국 정부 차원에서 어떤 사과나 배상은 없지만, 미국 민간재단이 베트남에 다양한 원조를 하고 있다. 전쟁의 비극적인 기억은 호찌민의 전쟁기념관에 전시돼 있는데 이곳은 미국인들도 많이 찾는 호찌민의 관광명소다. 필자는 박항서 축구감독의 신드롬이 한참인 2019년 2월 호찌민 전쟁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평소에는 있었던 베트남 참전 한국군에 대한 자료들이 거의 전시되지 않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것도 명분보다 장기적 국가이익을 중시하는 베트남 정부의 실용주의 방향일까, 아니면 임시적인 박물관 전시 사진의 교체일까? 코로나 사태가 종식되면 다시 한번 호찌민시에 들러서 직접 확인해 봐야 할 것 같다.
오철 <상명대 글로벌경영학과 교수 >
NIE 포인트
①미국의 워싱턴DC와 뉴욕처럼 베트남 수도인 하노이가 정치의 중심지, 호찌민시가 경제의 중심지로 나뉜 데 따른 장단점은 무엇일까.
② 베트남이 프랑스 미국 한국 등 과거 전쟁 상대국들과 긴밀히 협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③ 베트남에서 허용되는 그랩 에어비앤비 등 공유경제(내국인 대상 기준)가 한국에서 허용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3) 베트남 경제중심지 호찌민
베트남 국부의 이름을 딴 도시
호찌민시의 과거 이름은 사이공이고, 여전히 사이공이라는 명칭이 곳곳에 남아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뮤지컬 ‘미스 사이공’에서나, 한국의 쌀국수 음식점에도 사이공이란 명칭을 종종 쓰기 때문에 우리는 사이공이라는 명칭에 더 친숙할 수도 있다. 호찌민시 안에서도 사이공이란 이름을 현재에도 그대로 쓰는 경우도 많다. 호찌민시의 기차역 명칭도 사이공역이고 베트남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맥주의 브랜드 네임도 ‘사이공맥주’다. 그리고 호찌민시의 유명 호텔 중의 하나가 된 한국계 호텔의 명칭도 ‘롯데 레전드 호텔 사이공’이다.
호찌민시는 16세기까지는 캄보디아 영토였다가 이후 베트남이 이 도시를 포함한 주변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베트남 영토가 된다. 한참 시간이 흐른 1858년 베트남과 프랑스 간 전쟁 때 이 도시는 프랑스에 의해 점령되기도 하다가, 1862년 베트남·프랑스 전쟁의 종전 후부터 1945년까지 오랜 기간 프랑스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된다. 현재에도 호찌민시에 프랑스식 건축물과 유명 바케트집이 많은 이유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프랑스가 물러간 이후에는 남베트남의 수도가 된다.
1인당 GDP 베트남의 2배…그랩 등 공유경제도 허용
호찌민시는 수도인 하노이와 워낙 멀리 떨어져 있고, 과거에도 남베트남의 수도로써 상업이 발전했던 영향이 있어 하노이보다도 훨씬 더 경제적 활력이 있는 도시다. 맥도날드 1호점이 처음 생긴 도시이며, 곳곳에 스타벅스 매장도 베트남 어느 지역보다 많다. 또한 공유경제의 대표주자인 그랩이 한국에서는 아직 허용되지 않은 자동차 공유 사업을 하고 있다. 그랩은 호찌민시에 진출하면서 현지에 맞는 오토바이 공유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는데, 러시아워에는 이 오토바이 공유서비스가 매우 유용하다. 필자도 러시아워에 이동할 때 종종 오토바이 그랩 서비스를 이용하기도 했는데, 러시아워의 답답한 트래픽을 뚫고 제시간에 약속장소에 데려다준다.
호찌민시가 베트남의 경제 수도라는 사실은 여러 경제지표에서도 알 수 있는데, 호찌민시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베트남의 1인당 GDP보다 약 두 배나 많고, 하노이보다도 높다. 호찌민시의 여러 비즈니스 제도와 관행도 수도인 하노이와는 사뭇 다르면서 더 자유롭다. 이런 이유로 1986년 도이머이(개혁 개방)정책이 실시되면서 개방의 물결을 타고 많은 한국 기업들이 호찌민시에 특히 많이 진출했다. 나이키와 리복 등 세계적인 유명브랜드의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을 대부분 담당하는 업체도 주로 대한민국의 기업들이고, 삼성 LG 등 대기업들의 공장도 호찌민시 주변에 있다.
명분보다는 실용주의 노선 추구
지난 5월 19일은 베트남 국부 호찌민의 탄생 130주년이 되는 날이다. 호찌민은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이지만, 그의 지도노선이나 철학이 저서로 남아 있지 않아 후대에 종종 그가 공산주의자인지 민족주의자인지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호찌민은 프랑스와의 독립전쟁이 끝난 직후에 프랑스 자본의 베트남 지원을 요청했으며, 유언으로는 남베트남을 탄압하지 말라고 남겼다. 이런 사실을 볼 때 호찌민은 ‘눈앞의 명분보다는 장기적인 국가이익을 더 중시하는 실용주의자’라는 의견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남베트남을 탄압하지 말라는 호찌민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명분보다 장기적 국가이익을 중시하는 실용주의 방향은 그의 사후에도 지속적으로 견지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베트남 정부는 1975년 미국과 종전 이후 바로 적극적으로 대미(對美)수교를 추진했다. 도이머이 정책이 발표된 1986년 미국인의 비자 및 여행을 허용했으며, 미국 경제학자를 초빙했다. 또한 베트남 정부는 전쟁 당사자인 미국 및 프랑스와 수교할 때 어떤 사과나 금전적 배상금도 요구하지 않았다. 2009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취임연설에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국 군인들을 영웅으로 칭송했어도 어떤 공식적인 항의도 하지 않았다. 우리의 정서와는 맞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미국은 베트남의 최대 수출국이며, 프랑스는 베트남의 최대 우방국이고, 한국은 베트남의 최대 투자국이다. 미국, 프랑스, 대한민국 모두 20세기 베트남과 전쟁한 국가다. 미국과의 20세기의 치열한 전쟁에 대해서 미국 정부 차원에서 어떤 사과나 배상은 없지만, 미국 민간재단이 베트남에 다양한 원조를 하고 있다. 전쟁의 비극적인 기억은 호찌민의 전쟁기념관에 전시돼 있는데 이곳은 미국인들도 많이 찾는 호찌민의 관광명소다. 필자는 박항서 축구감독의 신드롬이 한참인 2019년 2월 호찌민 전쟁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평소에는 있었던 베트남 참전 한국군에 대한 자료들이 거의 전시되지 않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것도 명분보다 장기적 국가이익을 중시하는 베트남 정부의 실용주의 방향일까, 아니면 임시적인 박물관 전시 사진의 교체일까? 코로나 사태가 종식되면 다시 한번 호찌민시에 들러서 직접 확인해 봐야 할 것 같다.
오철 <상명대 글로벌경영학과 교수 >
NIE 포인트
①미국의 워싱턴DC와 뉴욕처럼 베트남 수도인 하노이가 정치의 중심지, 호찌민시가 경제의 중심지로 나뉜 데 따른 장단점은 무엇일까.
② 베트남이 프랑스 미국 한국 등 과거 전쟁 상대국들과 긴밀히 협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③ 베트남에서 허용되는 그랩 에어비앤비 등 공유경제(내국인 대상 기준)가 한국에서 허용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