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혁신을 만드는 공간
혁신이나 창조라는 말만큼 인기 있는 용어가 있을까? 혁신주도 성장, 지역혁신체계, 창조산업, 창조경제…. 혁신과 창조는 어느 정부에서나 선호하는 정책 용어가 됐다. 가죽에서 털을 벗겨내듯 구태를 걷어내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이기에 탐낼 만한 슬로건인 것은 분명하다.

혁신도시나 창조도시를 계획적으로 조성하는 것은 전문가와 정책당국의 오랜 꿈이다. 한국에서는 혁신도시를 전국에 10개나 건설했고, 창조도시도 한때 지방자치단체들의 가장 인기 있는 정책 공약이 되곤 했다. 정말 혁신공간이나 창조거점은 인위적으로 조성될 수 있을까?

정책연구소와 실행기관에 재직하다 보니 여러 신도시와 혁신지구를 계획하는 업무에 참여할 기회가 많았다. 세계를 통틀어 방송 등 언론이 가장 많이 집적된 디지털미디어 특화도시, 상암DMC는 57만㎡에 불과한 작은 지구(地區)다. 하지만 이 지구를 계획적인 미디어클러스터로 조성하기 위해 당시 서울시 부시장이 주재하는 회의만 50차례 이상 했던 기억이 있다. 연구 책임자로서 매주 밤새 회의자료를 준비하면서 계획적으로 특화된 혁신거점을 조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했다.

상암DMC 계획을 수립하면서 당시 디지털미디어 분야 최고 권위 연구소인 MIT 미디어랩을 어디에 배치할 것인지를 두고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워크숍을 한 적이 있다. 치열한 논쟁 끝에 MBC 건너편 사거리 핵심 부지가 선택됐다. 미디어랩은 소통과 교류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통행량이 가장 많은 중심지에 입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충격을 받았다. 우리나라 첨단연구소는 도시 외곽 녹지에 건설되거나 보안을 이유로 외부 출입을 철저히 제한하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싱가포르의 세계적 첨단산업단지인 원노스에선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설계했던 프리츠커건축상 수상자 자하 하디드가 독특한 곡선으로 토지이용 계획과 건축물을 설계했다. 산업단지를 습관적으로 공장집적단지로 보고 바둑판처럼 구획하던 한국의 도시계획 관행으로 보면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혁신공간은 혁신기관을 한곳에 모아두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주체들이 상호 소통하고 협력함으로써 혁신을 창출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설계돼야 한다. 구글캠퍼스의 찰리스카페는 동선이 겹치는 곳에 계획적으로 배치됐다. 의도하지 않은 만남을 통해 혁신을 유도하려는 건축가의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도시가 실험실이 될 것이라는 클라우스 슈바프, 혁신의 발전소로서 도시의 중요성을 강조한 에드워드 글레이저의 주장을 고려하면 이제부터는 도시 자체가 혁신과 창조의 공간이 돼야 한다. 혁신의 최전진기지인 혁신공간이나 창조거점은 아주 꼼꼼한 계획과 세심한 배려가 절실히 필요하다. 진정한 혁신은 여건이 성숙된 지역에서만 창출되고 확산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