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제주 서귀포시 롯데스카이힐 제주. 오전 조가 경기를 마친 후, 리더보드 위에는 정수빈(20)이라는 낯선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는 이날 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롯데칸타타 여자오픈 1라운드에서 버디 7개와 보기 1개를 묶어 6언더파를 적어냈다. 선두 한진선(23)과는 불과 3타 차다. 올해 데뷔한 그가 정규투어서 작성한 첫 60대 스코어. 단숨에 우승후보로 떠오른 그는 "모든 게 다 잘 풀렸던 것 같다"며 "2m 내 퍼트를 놓치지 않은 것이 좋았다"고 돌아봤다.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의 유명 외야수 정수빈(30)과 동명이인이다. 하지만 그는 골프 선수들 사이에선 이름보다 외모가 더 알려졌다. 일명 '리틀 고진영'으로 유명하다. "(고진영 프로의) 친동생 아니냐는 소리도 많이 듣는다"며 "내가 봐도 언니와 많이 닮았다"고 했다. 그는 "언니와 실력은 닮지 않아 고민이었다"며 "외모는 물론 실력도 언니를 닮고 싶다. 언니의 호쾌한 스윙이 정말 부럽다"고 했다.

그는 작년 KLPGA를 휩쓴 '2000년생 트로이카' 임희정, 조아연, 박현경(이상 20)과 동갑이다. 임희정은 지난해 3승, 조아연은 2승, 박현경은 올해 첫 메이저대회 KLPGA챔피언십 정상에 섰으나 그는 이제 갓 데뷔한 신인이다. 그는 "모두 성공한 부러운 친구들"이라며 "그들보단 느리지만 나도 천천히 나만의 길로 친구들처럼 정상에 서고 싶다"고 했다.

그도 한 때는 유망주였다. 7세 때 골프를 시작했고, 초등학교 때 나간 첫 지역 대회에서 3위를 했을 정도로 앞날이 밝았다. 골프를 권한 아버지에게 배우다가 티칭 프로에게 찾아가 레슨을 받았는데, 되레 독이 되어 돌아왔다고 한다. 그는 "정식 레슨을 받은 후 입스가 찾아와 드라이버와 아이언 모두 안맞았다 총체적 난국이었다"며 "국가 상비군에 들고 싶어 시작했는데 역효과가 났다"고 회상했다.

입스를 고쳐준 것도 아버지 정왕석 씨다. 정 씨는 원래 태권도장을 운영했다. 골프는 문외한이었으나 딸을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골프를 글로 배웠다. 정 씨는 "이론만 알고 실제로 골프는 잘 못친다"며 껄껄 웃었다. 정수빈은 "아버지는 내가 안풀리는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을 연구해 알려주시는 스타일"이라며 "지금도 스윙이 안맞으면 아버지가 봐주신다. 아버지는 내 친구이자 스윙코치, 캐디이기도 하다"며 엄지를 세웠다.

어렵게 찾아온 기회인만큼, 남은 라운드에서 톱10 이상의 성적을 낼 수 있는 페이스다. 정수빈은 "기회가 왔다고 지키는 플레이를 하지 않겠다"며 "더 공격적으로 남은 라운드를 치를 것"이라고 다짐했다.

서귀포=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