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 넷플릭스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tvN 제공
최근 일본 넷플릭스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tvN 제공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은 국내에서 시청률 20%를 돌파할 만큼 큰 인기를 얻었다. 지난 2월 종영될 때 아쉬워한 팬도 많았다. 이 드라마가 일본에서 다시 살아났다. 일본 넷플릭스에서 지난달 3주 연속 ‘오늘의 종합 톱 10’에서 1위를 기록한 것이다. 이 드라마는 한반도 분단 상황을 로맨스의 소재로 끌고 온, 지극히 한국적인 작품이다. 그런데 다른 나라, 그것도 한국에 정치·경제적으로 빗장을 굳게 잠근 일본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전 세계가 몇 달 전 걸어둔 국경 봉쇄를 풀지 않고 있다. 바이러스 때문이든, 각국의 이해관계 때문이든 이전과는 다른 날선 분위기다. 하지만 문화 콘텐츠는 이 빗장을 아무렇지 않다는 듯 풀어내고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고 있다.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는 ‘K콘텐츠’란 이름으로 세계 곳곳에 흘러들고 있다. 한류가 어제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인류가 처음 맞는 위기 속에서 피곤에 지친 세계인에게 K콘텐츠가 위로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은 새삼 놀랍다.

‘사랑의 불시착’뿐 아니다. 김은희 작가가 넷플릭스에서 선보인 드라마 ‘킹덤’은 더 멀리 달려갔다. 한복을 입고 갓을 쓴 좀비 떼가 질주하는 모습이 낯설 법도 한데, 미국과 유럽 등에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TV 부문 오스카’라고 불리는 미국의 ‘국제 에미상’에도 출품돼 작품상에 도전한다.

K콘텐츠는 곳곳에서 견고한 장벽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그 위력을 체감할 때마다 어깨가 으쓱해진다. 한편으로는 궁금해진다. ‘한국은 어떻게 콘텐츠 강국이 됐을까.’ 국내뿐 아니라 해외 전문가들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한다. 신비하게만 느껴지는 기적 같은 일이지만,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 답을 찾기 위해 한국 콘텐츠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웠던 순간을 떠올려보자. 올 2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장면이 스친다. 영화 ‘기생충’이 작품상, 감독상 등 4관왕의 영예를 안은 순간, 그 공은 다름 아닌 한국 관객에게 돌아갔다.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모든 영화에 대해 주저하지 않고 의견을 말씀해주신 한국 관객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의견 덕분에 안주하지 않을 수 있었고 창작자들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애정 어린, 그러나 높은 안목과 날카로운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 이들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창작자들은 지난한 길을 걸어왔다. 이는 곧 세계로 통하는 길이었다. 최근 몇 년 동안에 더욱 그랬다. 넷플릭스가 2016년 국내에 진출한 이후 사람들은 세계의 웬만한 장르와 스토리를 모두 접할 수 있게 됐다. “이제 모든 국민이 평론가”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고, 그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창작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했다. 까다롭고 쉽게 끓어오르는 한국인의 성향은 디지털 시대에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 배급사들은 흥행 여부를 점치기 위해 한국 시장을 ‘테스트베드(시험공간)’로 활용하고 있다.

이런 K콘텐츠의 발전 과정은 다소 엉뚱한 것과 연결된다. 한국의 제조업이다. 변방에 있던 한국의 제조업은 앞서 비슷한 길을 걸으며 글로벌 강자의 자리를 차지했다. 어느 순간부터 한국의 까다로운 소비자들을 만족시킬수 있다면, 글로벌 시장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콘텐츠의 성장 전략도 제조업의 그것과 비슷했다. 처음엔 무조건 따라하기였다. 해외 브랜드를 보며 TV, 오디오 등을 비슷하게 생산하던 과거 제조업의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처럼, 콘텐츠산업도 그렇게 시작됐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미드(미국 드라마)’ ‘일드(일본 드라마)’를 보며 비슷하게 제작했다. 그런데 따라하면서도 좀 달랐다. 해외 작품의 판권을 사와 리메이크하면서도, 완성도를 높여 원작보다 더 잘 만들어냈다. 이를 보고 놀란 현지 제작사들은 역으로 다른 한국 작품에 관심을 보였다.

다른 나라엔 없는 차별화된 시스템도 만들어냈다. 새로운 작가의 발굴이다. 최근 화제가 된 작품들을 떠올려보면 그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 ‘n번방 사건’을 예견이라도 한 듯한 넷플릭스 드라마 ‘인간수업’은 진한새 작가의 장편 데뷔작이다. 올초 많은 인기를 얻었던 SBS의 야구 드라마 ‘스토브리그’도 이신화 작가의 데뷔작이다. 이런 성과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굴해야 하는 과제를 아예 하나의 시스템을 구축해 풀어가고 있는 덕분이다. CJ ENM의 ‘오펜’은 신인 작가들을 뽑아 집필실을 제공하고 교도소,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해준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담아내면서도, 현실과 밀착해 스토리를 촘촘하게 전개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다른 장르와의 융합도 적극 활용할 줄 안다. 상상력에 어떤 한계도 없는 웹툰을 영상으로 구현하고 있다.

K콘텐츠를 감상하고 있다 보면 조선시대 ‘전기수’가 떠오른다. 전기수는 저잣거리에서 소설을 읽어주던 사람을 이른다. 사람들은 전기수 주변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들으며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이야기에 취해 울고 웃다 보면 배고픔도, 고단함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으리라. 카렌 암스트롱의 저서 《축의 시대》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척박한 영토와 잦은 전쟁에도 위대한 시인들의 비극을 보며 슬픔이 정화되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이 과정에서 귀중한 유대가 만들어진다고도 생각했다.

지금의 K콘텐츠가 사랑받고 있는 이유도 비슷하다. 오래전부터 지독히도 이야기를 사랑한 민족이 만든 작품들이 아닌가. 그렇게 쌓인 콘텐츠들은 이제 전 세계 사람들을 울고 웃게 한다. 혹독하고 어려운 시기를 함께 견뎌낼 수 있도록 말이다. 이야기가 전하는 마음의 울림엔 어떤 빗장도 없다.
부검·교도소 생생한 장면의 비밀…신인 작가에 현장취재 기회
다양성 높이는 K콘텐츠 비결


‘저런 건 대체 어떻게 알았지?’ 드라마를 보다 보면 몇몇 장면에서 깜짝 놀라곤 한다.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부검 장면에선 수준 높은 전문 지식에 탄성이 나온다. 사극을 볼 때도 그렇다. 잘 몰랐던 역사적 사실을 드라마를 통해 접할 때면 작가가 역사 공부를 얼마나 많이 한 건지 궁금해진다.

시청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이런 장면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건 구체적인 정보다. 그런데 신인 작가들은 정보를 얻기 어렵다. 기성 작가들과 달리 관련 기관에 취재 요청을 해도 잘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발한 아이디어가 있어도 정보가 부족하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

[김희경의 콘텐츠 인사이드] 제조업 '추격자 전략' K콘텐츠에도 통했다
최근 K콘텐츠가 다양해진 것은 이 같은 문제가 서서히 해소되고 있는 영향이 크다. CJ ENM은 2017년부터 신인 작가 지원 사업 ‘오펜’을 통해 현장 취재를 연결해준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도 직접 섭외해 집필에 필요한 강연을 하게 한다. 지금까지 이 사업을 통해 94명의 신인 작가가 배출됐다. 다른 방송사들도 신인 작가를 적극 발굴하고,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다. SBS는 지난 4월 드라마국을 분사해 ‘스튜디오S’를 출범하고 신인 작가를 대거 영입했다. 집필 지원 등을 통해 데뷔도 돕고 있다.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