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실리콘밸리의 '코로나 이후' 대처법
4일(현지시간) 미국 실리콘밸리를 관통하는 101번 도로는 하루종일 뻥 뚫려 있었다. 석 달 전만 해도 수시로 막혔던 길이다. 도로 좌우로 모세혈관처럼 퍼져 있는 기업들의 주차장도 대체로 한산했다. ‘코로나 봉쇄’가 풀리면서 출근은 허용됐지만 다수 임직원이 재택 근무를 하고 있어서다. 간간이 내리던 봄비가 자취를 감추면서 주말 교외의 해변은 나들이객들로 북적거린다. 여전히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

초여름에 접어든 실리콘밸리는 차분해 보인다. TV를 통해 전 세계로 생중계되고 있는 미국의 아찔한 혼란상들과 비교하면 더 그렇다. 물론 미국 전역에서 들끓고 있는 인종차별 항의 시위로 저녁 8시 이후 통행금지령도 발동됐다. 하지만 격렬한 폭력 시위는 거의 볼 수 없다.

[특파원 칼럼] 실리콘밸리의 '코로나 이후' 대처법
기업들은 예전보다 더 민첩하게 위기에 대응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가 지난달 온라인으로 개최한 개발자 콘퍼런스 ‘빌드 2020’은 미래의 콘퍼런스 행사를 보여주는 예고편이었다. 굳이 오프라인 행사를 다시 찾을 필요가 없을 정도의 완성도를 갖췄다. 값비싼 입장료와 호텔비를 낼 필요도 없다. 시공간의 제약으로 매년 6000명 안팎으로 제한했던 참석자 수는 올해 10만 명으로 늘었다. 이런 디지털 공간을 경험한 기업들은 앞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장·단점을 꼼꼼히 따져볼 것이다.

코로나19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경영 전략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직원들에게 중장기 재택근무 전환 방침을 설명하면서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전 세계의 인재를 두루 채용할 수 있고, 페이스북의 성장 산업인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 기술을 촉진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애플 구글 엔비디아처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사업을 함께하는 기업들도 임직원들의 사무실 복귀를 서두르지 않는다. 경영진은 “사옥에 쏟아부은 천문학적인 비용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대신 인력과 자본을 바이오, VR, 클라우드 등 ‘포스트 코로나’ 사업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벤처캐피털 생태계도 이 시장으로 몰려가고 있다. 그동안 실리콘밸리 생태계에 붙었던 군살도 자연스럽게 빠지고 있다.

아마존은 다른 기업들이 현금 확보에 매달릴 때 과감한 선제 투자에 나서겠다고 발표했다.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CEO는 최근 주주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올해 2분기의 예상 영업이익 40억달러를 모두 코로나19에 대응하는 데 쓰겠다”며 “아마존은 작게 생각하지 않는다(We’re not thinking small)”고 강조했다. 단기 수익성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장기적인 시장 지배력을 우선시하는 그의 경영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이런 경영 전략은 단기 실적을 중시하는 ‘주주 자본주의’ 경영 스타일과 확연하게 다르다. 오히려 삼성그룹의 이병철, 현대그룹의 정주영 등 국내 대기업 창업주들의 면면을 닮았다. 올 들어 주가가 폭등한 테슬라는 2012년 무렵부터 자율주행차 기술에 과감하게 투자했다. 다른 완성차업체들이 안전성 문제로 손사래를 치던 시기다.

최근 들어 미국 고속도로에선 운전대를 놓고 테슬라 차량을 운전하는 장면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테슬라의 자율주행 기술이 운전대를 잡지 않고 영화를 보거나 휴대폰을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연간 40만 대가량 파는 테슬라의 기업가치(시가총액 1601억달러)가 770만 대를 파는 미국 1위 제너럴모터스(417억달러)의 4배에 육박하는 주요 이유다.

MS 애플 아마존 구글 페이스북 등 실리콘밸리의 ‘테크 빅5’는 이미 코로나19 사태 이전에 미국 시가총액 1~5위 기업으로 올라섰다. 전 세계 소비자들이 이들의 플랫폼을 통해 물건을 사고 새로운 인간 관계를 맺고 있다. 이 과정에서 쌓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유망 사업 기회를 싹쓸이하듯 선점한다. 한국 시장, 한국 기업이라고 이런 글로벌 트렌드를 피해갈 수 있을까. 한국 기업들이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때다.
더 강화되는 美 정부와 기업의 밀월 관계

최근 들어 미국에서 정부와 기업의 밀월관계를 자주 볼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보호무역주의가 확산하자 정부와 기업 사이의 협력 강도가 세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프랑스가 지난해 미국의 정보기술(IT) 기업들에 디지털세를 부과하자 미국 정부가 곧바로 와인 등 수입품에 보복관세를 물린 게 대표적이다. 미국 기업들도 코로나19 대응과 같은 정부의 각종 정책에 적극 협력하고 있다.

정부가 정책의 효율성과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기업을 끌어들이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지난달 민간 기업 중 처음으로 유인 우주선 발사에 성공한 ‘스페이스X’가 그런 사례다. 미 항공우주국(NASA)은 스페이스X와 같은 민간 기업들을 끌어들여 200억~300억달러로 추산되던 우주 탐사 비용을 60억달러로 대폭 줄였다. 정부가 지출하는 막대한 연구개발 자금은 직·간접적으로 미국 기업에 흘러들어간다.

미국 정부가 대학에 지원하는 자금도 궤를 같이한다. 매사추세츠공대(MIT)의 경우 2018년 기준 전체 연구개발 비용 17억6000만달러의 89.6%가 연방정부에서 나왔다. 특히 중국 정부가 자국 IT 기업들에 대한 지원을 늘리자 미국 정부도 대응 수위를 계속 높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