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는 아침마다 글밭을 가꾸며, 누구는 춤을 추고 노래하며, 누구는 마른 땅에 씨를 뿌리며, 누구는 기타를 치고 바이올린의 선율을 다듬으며 새 날을 연다. 희망을 다듬는다. 누구는 도시의 생태를 지키며, 누구는 민족을 뜨겁게 사랑했던 선열을 기리며, 누구는 날마다 선교와 돌봄으로, 누구는 이웃과 청소년을 보듬으며, 누구는 우리 고유의 삶과 멋을 되살리며 저마다의 결을 만든다. 멋과 향기를 빚는다….
'당신을 업으니 내 등이 따뜻해' 서문 중에서
캐리커처 지선호, 글 변광섭'당신을 업으니 내 등이 따뜻해'
캐리커처 지선호, 글 변광섭'당신을 업으니 내 등이 따뜻해'
영국 런던에 알랭드 보통의 ‘인생학교’가 있다면 한국의 청주에는 ‘희망얼굴 희망학교’가 있다. 인생학교는 영국의 인기작가 알랭드 보통이 문화, 예술, 교육계에 종사하는 지인들과 2008년 런던 마치몬트 거리에 세운 학교로 삶의 지혜를 얻고 공감과 공유의 가치를 확산하기 위해 만들었다.

청주의 ‘희망얼굴 희망학교’는 희망얼굴이라는 이름으로 캐리커처를 그려온 청주 산남고등학교 지선호 교장과 문화기획자 변광섭 씨(청주대학교 교양학부 겸임교수)가 희망얼굴 주인공의 이야기를 공유하며 지역의 희망을 빚자는 취지로 2018년 7월부터 시작했다.

지선호 교장은 10년 전부터 학생과 교사의 일상이나 얼굴 풍경을 한 줄의 짧은 희망 메시지와 함께 캐리커처로 그려왔다. 이름하여 ‘희망얼굴’이다. 탈선의 고비에 있거나 상처받은 학생들이 캐리커처를 선물 받고 마음을 다지며 희망의 새 길을 나서기도 했다.

여기에 힘입어 지 교장은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각계각층의 시민 등을 대상으로 캐리커처를 그리기 시작했다. 최근 5년 동안 어림잡아 2천여 명을 그린 것으로 집계된다.

소식이 알려지면서 정치인과 연예인 등도 캐리커처를 그려달라는 제의와 추천이 쏟아졌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 방탄소년단과 손홍민 등의 연예 및 스포츠계 인사, 코로나19의 최전선에서 힘쓰고 있는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을 비롯한 의료진 등이 포함돼 있다.

지선호 교장이 그린 캐리커처 주인공이 하나 둘 늘자 문화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는 청주대학교 교양학부 변광섭 교수가 ‘희망학교’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변 교수는 “영국에는 알랭드 보통의 인생학교가 있듯이 대한민국 청주에는 ‘희망얼굴 희망학교’를 만들어 있음을 알리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예술, 교육, 복지, 환경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희망얼굴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함께 공유하며 새로운 희망을 빚으면 좋겠다”며 희망학교 제안의 이유를 말했다.

이에 따라 2018년 7월부터 지난해 말까지 2주에 한 번씩 재능기부 형식으로 청주의 향토기업인 ㈜본정 문화센터에서 ‘희망얼굴 희망학교’를 운영했다. 희망학교는 정치, 경제, 교육, 문화예술, 환경, 복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청주지역의 캐리커처 주인공을 한 명씩 초청해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듣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에는 캐리커처를 그려 온 지선호 산남고 교장을 시작으로 조동욱 충북도립대 교수, 김종대 20대 국회의원, 변광섭 문화기획자, 이종태 ㈜본정 대표, 유용성·정지현 예술인 부부, 김정희 진지박물관장, 김창규 목사, 안남영 전 HCN충북방송 대표, 김병기 시인 등 36명이 참여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정상적인 특강을 진행하지 못했다. 대신 그간 활동해온 내용을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책 제목은 '당신을 업으니 내 등이 따뜻해'(도서출판 달밭)다. 이 책은 지금까지 희망학교 프로그램에 참여한 36명의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있다. 지선호 산남고등학교 교장이 캐리커처를, 문화기획자인 청주대학교 교양학부 변광섭 교수가 글을 썼다.

지선호 교장은 ‘나는 왜 캐리커처를 그리는가’를 주제로 학교에서 학생들과 교사들을 대상으로 시작한 캐리커처 그리기가 사명감이 되면서 지역과 세계의 인물 2천여 명의 얼굴을 그려왔음을 웅변했다.

지나간 추억도 희망이라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풍경을 그려온 이야기를 담았다. 신체장애를 딛고 대한민국 최고의 소리분석 전문가가 된 조동욱 충북도립대 교수는 ‘너의 목소리가 궁금해’라는 주제로 음성 분석을 통해 한 사람의 건강, 꿈, 마음의 상태를 알 수 있다고 강변했다.

강전섭 청주문화원장은 ‘책과 함께 나의 꿈, 나의 인생’이라는 주제로 20여 년 간 고서 수집을 위해 월급봉투 한 번 집에 가져가지 못하고 전국의 헌책방을 돌아다닌 이야기와 수많은 향기 중에 책 향기만큼 설레게 하는 것이 없었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또 홍준기 전 청암학교 교장은 ‘살아온 날, 살아갈 날’이라는 주제로 어려서부터 안짱다리라는 놀림을 당하며 겪어야 했던 아픔과 그 아픔을 딛고 교육행정가로 존재감을 드러낸 과정을 진솔하게 담았다.

이상조 다락방의 불빛 대표는 ‘음악으로 여는 행복세상’이라는 주제로 은행원이 음악에 심취하게 된 배경과 뮤직스토리텔러 활동을 통해 지역사회에 문화적 토양을 가꾸는 이야기를 소개했다.

이밖에도 청주시청소년상담센터 김남진 센터장은 학교밖청소년들이 꿈을 일구며 자립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학교밖청소년들은 ‘문제아’가 아니라 ‘다름’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최종 목표는 꿈을 일구는 것이며 자립이기에 지역사회의 따뜻한 시선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재사업회 윤석위 대표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힘써온 이야기를, 청주시의회 박완희 의원은 도시에 왜 숲이 필요한지를, 충북경제사회연구원 이두영 원장은 왜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이 중요한지를, 민속사진작가 송봉화 씨는 ‘사진으로 보는 우리동네 민속문화’라는 주제로 우리의 문화원형이 일본이나 유럽 등 해외에서 더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현실을 토로하며 사진작가는 현장에 있어야 하고 현장에서 살아야 하며 사진 한 장 남기고 현장에서 죽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캐리커처를 그려 온 지선호 교장은 “노적성해(露積成海). 이슬방울이 모여 바다를 이루는 것처럼 우리 모두가 희망이니 모이고 모여 지역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며 미래를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며 “희망얼굴 희망학교가 그 변화의 시작이 되고 세상의 변화를 주도하는 노둣돌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문화기획자 변광섭 씨는 “오랫동안 지역문화의 현장에서 축제와 콘텐츠 개발 등의 일을 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니 사람보다 더 소중한 자원이 없다는 것을 절감했기에 지역 활동가들이 저마다의 살아온 경험과 꿈을 이야기하고 공유하는 자리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라며 “희망얼굴 희망학교가 서로의 경험과 가치를 공유하고, 서로의 꿈과 비전을 응원하며, 지역의 아픈 곳을 보듬고 상생과 발전을 견인하는 소중한 역할을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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