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넓고 먹거리는 다양하다. 77억 명의 세계인이 먹는 음식 중에는 진기한 것도 많다. 필자는 직업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다양한 음식을 맛봤다. 태국에서는 깡통에 담긴 악어 고기를 먹었다. 호주 대사가 주최한 만찬에는 캥거루 요리가 나왔다. 프랑스에서는 개구리 뒷다리와 달팽이 구이가 별미다. 일본 식당에서는 말고기 사시미를 경험했고 독일에서는 바다거북 수프를 먹었다. 페루에서는 식용 쥐인 꾸이 요리를 맛봤다.
집단에 따라 즐겨 먹는 음식이 다르다. 문제는 타 문화권의 음식을 경멸하거나 혐오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영국인들은 개구리를 먹는 프랑스를 비꼬아 ‘프로그(frog)’나 ‘조니 크라포(Johnny Crapaud: 크라포는 프랑스어로 개구리를 의미)’로 부른다. 개고기도 마찬가지다. 서구의 동물보호단체들은 개 식용 반대 캠페인을 전 세계적으로 펼친다.
과거 한국도 캠페인의 주요 대상국이었다. 특히, 서울 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 때 한국 대사관은 수많은 항의 데모와 편지로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당시 우리의 논리는 ‘문화상대주의’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즉, 각국은 고유의 식문화를 가지며, 개고기는 한국 외에도 중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인들이 오랫동안 즐겨온 음식이다. 일부 서구 국가에서 말고기와 거위 간을 먹으면서도 개 식용만을 비판하는 것은 자문화 중심주의에 입각한 편협한 사고라는 것이다.
문화상대주의 vs 자문화중심주의
우리의 대응 논리가 잘 먹혀든 것 같지는 않다. 서구에서 개 식용을 반대하는 이유는 인간과 개의 친밀감 때문이다. 프랑스 동물보호운동가 브리지트 바르도가 쓴 글의 제목이 ‘친구를 먹을 수 있는가’라는 데서 서구인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이들에게는 자신의 신념과 부합되는 논리만 받아들이는 확증편향이 작용하기 쉽다. 최근 국제사회의 비판은 수그러들었다. 대사관에 보내는 항의서한도 거의 없어졌다. 무엇보다 반려동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바뀌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스웨덴 항구도시 말뫼에는 ‘혐오식품 박물관’이 있다. 이곳에는 80여 개의 혐오 음식이 전시돼 있다. 황소 음경, 튀긴 독거미, 구더기를 넣은 치즈, 쥐를 넣은 와인 등. 일부 음식은 현장 시식도 가능하다. 입구에서 방문객에게 토사물 봉지를 나눠주는데 열 번이나 토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우리의 산낙지와 일본의 낫또도 전시돼 있다. 한 나라의 기호식품이 다른 문화권에서는 혐오식품이 된 것이다.
인간은 질병에 대한 방어기제로 혐오감을 발전시켜 왔다. 혐오를 느끼지 못하면 부패한 음식을 먹고 죽을 수도 있다. 문화적 요소도 있다. 사회로부터의 습득과 전달을 통해 또는 타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혐오감을 갖기도 한다. 최근 음식에 대한 편견도 바뀌고 있다. 과거 기피 대상이었던 김치가 오늘날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푸른곰팡이가 피어 있는 치즈를 좋아하는 동양인도 늘고 있다. 다양한 먹거리에 대한 상호이해가 중요한 시대가 됐다.
음식문화 다양성과 식습관은 별개
그러나 음식문화의 다양성 존중과 비위생적인 식습관은 별개 문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최근 20년간 사람에게 발생한 신종 전염병 중 60%가 인수공통감염병이며 이 중 대부분이 야생동물로부터 유래했다고 지적한다. 즉, 에이즈, 에볼라, 메르스, 사스 등이 야생동물에게서 전염됐다는 것.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도 천산갑을 중간숙주로 박쥐로부터 인간에게 전파됐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에 따라 야생동물을 먹는 식습관이 근절돼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야생동물을 먹는 습관은 일부 지역에서 음식문화로 자리 잡았고 식용이나 약재로 쓰기 위해 다량의 야생동물이 국제적으로 거래, 소비되고 있다.
코로나19는 많은 생명을 빼앗고 세계 경제를 마비시켰다. 무분별하고 비위생적인 야생동물 거래와 소비가 규제돼야 하는 이유다. 인류는 생물 종(種)의 다양성 보호를 위해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CITES)을 채택, 시행 중이다. 이제는 인류의 건강을 위해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야생동물 거래와 소비를 규제해야 할 때다. 보다 엄격한 위생 기준과 글로벌 교육 프로그램도 마련돼야 한다. “살기 위해 먹는 걸까, 먹기 위해 사는 걸까?”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먹는 것이 인류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되는 요즈음이다.
박희권 < 글로벌리스트·한국외국어대 석좌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