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 가치를 명백하고 현저히 훼손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HDC현대산업개발이 9일 아시아나항공 인수 조건을 원점에서 재검토하자고 채권단에 제안하면서 내놓은 입장문의 핵심 내용이다. “계약 체결 당시엔 예상할 수 없었다”는 점도 강조했다. 매각 대금을 깎아주지 않으면 인수를 포기할 수 있다는 ‘압박성 문구’로 해석된다. 사전에 예고되지 않은 HDC현산의 입장문에 채권단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HDC "아시아나 부채 4.5조나 늘어…2.5조 다 주곤 인수 못해"
“인수 계약 후 부채비율 급증”

HDC현산은 미래에셋금융그룹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지난해 12월 27일 금호산업, 산업은행과 2조4999억원에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올 들어 터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항공업황이 빈사 상태에 빠지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HDC현산은 “예상치 못한 중대한 변수”라고 표현했다.

아시아나항공은 인수 당시 9조5989억원이던 부채가 올해 1분기 말 13조2041억원으로 3개월 만에 3조6000억원 불어났다고 공시했다. 반면 같은 기간 자본총계는 1조4554억원에서 2103억원으로 쪼그라들었다. 부채비율은 659%에서 6280%로 급증했다.

HDC현산 관계자는 이와 관련, “아시아나항공의 회계를 신뢰할 수 없어 자체 분석한 결과 인수 계약 후 불어난 부채가 4조5000억원에 달한다”며 “회계상 부채가 추가로 인식되고, 차입 등이 늘어나 지난해 6월 말과 비교하면 부채비율은 1만6126% 증가했다”고 말했다.

HDC현산은 입장문에서 아시아나항공의 비협조도 문제 삼았다. 지난 4월 이후 11차례 공문을 보내 재무 상태 등과 관련한 자료를 요청했으나 신뢰할 만한 공식 자료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사전 동의 없이 이사회를 열고, 부실 계열사(에어서울 등)에 1400억원을 지원한 뒤 통보한 바 있다고 주장했다. HDC현산은 이를 근거로 채권단에 인수 종료 시점을 이달 27일에서 연말로 미루고 인수 가격도 대폭 낮춰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채권단 당혹감 속 “상황은 잘 알고 있다”

공을 넘겨받은 채권단은 HDC현산의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공식적인 반응도 내놓지 않았다. 채권단의 한 관계자는 “HDC현산의 주장대로 계약 시점과 지금의 상황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HDC현산과 충분히 논의할 생각이 있다”고 밝혔다.

매각 주체인 금호산업과 당사자인 아시아나항공은 사태 추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HDC현산이 인수가를 낮춰달라고 채권단에 요구하고, 채권단이 이를 수용하면 금호산업이 팔았던 아시아나항공의 지분 가격이 먼저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아서다.

HDC현산이 계약한 2조4999억원 중 금호산업이 보유한 아시아나항공 지분(30.88%) 가격은 3228억원이었다. 나머지는 차후 유상증자 등을 통해 지급하는 구조다. 금호산업은 채권단과 HDC현산이 가격 협상을 벌일 경우 결국 아시아나항공 지분 가격이 조정될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날 아시아나항공 주가는 4440원에 마감됐다. 인수 당시 책정된 주가(4700원)는 물론 계약 당시 주가(5430원)보다 낮다.

“인수 의지 변함없다지만…”

시장에선 HDC현산이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먼저 포기하진 않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HDC현산도 이날 낸 입장문의 첫 문장에서 “인수 의지에 변함이 없다”고 전제했다.

일각에서는 아시아나항공의 매각 무산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HDC현산이 예상하는 적정 인수가와 채권단이 고려하는 매각가의 차이가 좁혀지지 않을 경우다. 이 경우 HDC현산이 미리 낸 2500억원가량의 계약금을 둘러싼 소송전으로 이어지는 ‘최악의 수순’에 접어들 수 있다. 한화케미칼은 2008년 워크아웃 중이던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지만, 이후 무산됐다. 당시 한화케미칼은 납입한 이행보증금(3150억원)의 일부를 소송 끝에 돌려받았다. 이번 HDC현산의 입장문 발표를 ‘출구 전략’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채권단이 HDC현산의 요구를 받아들여 재협상에 나설 경우 다른 매각 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당장 이스타항공 인수를 진행 중인 제주항공도 재협상을 요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재후/박종서 기자 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