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10년 후에 보자
예전 내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출석부 번호를 지금처럼 생년월일 순으로 하지 않고 키 순서대로 했다. 키가 작은 아이부터 키가 큰 아이 순서로 번호가 정해졌다. 나는 10번을 넘지 못했다. 그만큼 키가 작은 아이였다.

학년 초가 되면 선생님은 아이들을 복도로 불러내 한 줄로 세우고 대충 알아서 키 순서대로 서 보라고 했다. 나는 번번이 보다 높은 번호를 받으려고 발뒤꿈치를 올리다가 들켜 꾸중을 듣곤 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예전에 사범학교라는 게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가던 직업학교로, 이 학교를 나오면 곧바로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았다. 그 덕분에 시골의 가난한 집 아이들이 몰리곤 했던 학교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공주사범학교다. 역시 그 학교 시절에도 나의 번호는 10번을 넘지 못했다. 그런데 3년을 두고 내내 1번만 하던 아이가 있었다. 나이도 한 살 어리지만 성장이 더뎌 고등학생인데 중학생 정도의 소년 모습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사범학교 졸업식이 있던 날, 그 1번 친구가 말했다. “얘들아, 10년 후에 다시 보자. 그때 나는 너희들하고 다시 키를 재러 올 것이다.” 그것은 그냥 장난기가 섞인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친구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10년 후에 보자!’ 그것은 내 가슴에 예리한 침이 돼 박혔다. 그래, 10년 후에 보자. 그 말을 가슴에 새기며 살았다. 그것은 엉뚱하게도 나의 삶의 지표가 됐고 멀리 내 인생의 길을 제공했다.

그래서 어찌 됐나? 그로부터 10년 후인 1973년 나는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고 첫 시집을 출간한 시인이 돼 있었다. 그건 그 뒤에도 마찬가지, 10년 단위로 나는 이전과 다른 그 어떤 사람이 돼 있었다. 10년 후 초등학교 교감, 그다음은 장학사, 다시 그다음은 초등학교 교장. 그렇게 교직 생활을 마치고 다시 10년 후에는 공주문화원장이 됐다. 그리고 10년이 채 되지 못해서 지금은 한국시인협회 회장이다.

10년 후에 보자. 결국, 이 말은 앞날에 대한 목표를 분명히 세우고 10년 동안 그 목표를 행해 힘써 나아가 보자는 얘기다. 치열한 노력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 그러할 때 그 목표가 이뤄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렇게 우리네 인생에서 삶의 목표란 것은 중요하다.

여기, 새내기 직장인이 있다고 치자. 그의 꿈은 팀장이 되는 것이라 하자. 그러나 꿈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 꿈을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자기 인생에서 10년 정도를 투자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 꿈이 이뤄지는 날이 온다.

오늘날 나는, 10년 후에 보자고 말하기가 어렵다. 그만큼 나이가 든 사람이 됐다. 그래서 이제는 5년 후에 보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면서 산다. 아직도 나는 미래에 대한 소망과 꿈을 버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