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잊어버린 부장 찾기
얼마 전 은퇴한 선배를 만났다. 대화의 흐름은 당연히 추억 소환이다. “그때 그 부장 말이지. 왜 있잖아. 안경 쓰고 호리호리하고. 아! 이름이 뭐더라.” 아! 얼굴은 가물가물한데 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부장 찾기를 접었지만 뒤끝이 영 개운치 않았다. 집에 돌아와 다른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겨우 이름을 알아냈다.

이 대책 없는 건망증을 어떻게 할 것인가. 휴대폰이나 소지품을 어디에다 뒀는지 잊어버리는 일은 다반사. 숫자 기억은 더욱 심각하다. 기념일, 약속 날짜, 전화번호들이 머릿속에서 숨바꼭질을 한다. 어쩌다 발목 잡힌 기억들도 시간이 지나면 또 휘리릭 달아나버리기 일쑤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出納)을 담당했던 승정원에서 작성한 업무일지다. 그날의 문서 및 사건, 왕의 동정, 신하와의 접견, 경연과 각종 회의, 상소문 등이 상세히 적혀 있다. 주서는 문서 보관과 기록, 왕명 전달과 관청 간 연락을 담당했다. 왕과 신료들의 대화 내용을 빠짐없이 받아 적어야 했기 때문에 뛰어난 문장력과 속필은 기본이었다. 지금의 국회 속기사다.

주서는 왕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으나 고달픈 자리이기도 했다. 소리가 작거나 말이 빠른 경우, 발음이 불명확하거나 중언부언 길게 늘어지면 받아적기 곤혹스러울 수밖에. 이쪽과 저쪽이 동시에 얘기하면 순서대로 말하라고 할 수도 없고, 지엄하신 왕에게 못 들었으니 다시 말해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이 왕의 사후에 사관들이 기록한 사초를 토대로 편집한 2차 자료라면 《승정원일기》는 실시간으로 써내려간 무삭제판 현장 기록물이다. 분량은 총 3242책, 2억4250만 자에 달한다. 《조선왕조실록》의 다섯 배가 넘는다. 이 엄청난 양과 역사적 가치, 기록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2001년 9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승정원 사람들…. 이들은 아마도 지독한 메모광이었을 것이다. 이들이라고 건망증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승정원일기》라는 위대한 문화유산을 남긴 동력은 기록에 대한 열정, 끊임없는 메모 습관에 있었다.

우리는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살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하는 일보다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더 많은 것을 보면 우리의 뇌는 확실히 망각의 편이다. 내 머릿속에 있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망각의 품으로 도망친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도 적어두지 않으면 돌아서자마자 잊어버린다. 다시 생각하려 해도 원본과 상당히 달라져 있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의 뇌를 서서히 지배하는 망각을 받아들여야 한다. 뭐든지 다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아야 머리도 다른 활동을 할 수 있을 터. 그러니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움츠러들 일이 아니다. 적자. 달아난 기억을 애써 붙잡으려 하지 말고 기록과 메모의 힘을 기르자. 적어야 남는다. 그때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던 부장 이름을 적어 놓으려 수첩을 꺼냈다. 헉! 이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뭐지, 뭐지. 아! 뭐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