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 20년] 시장을 열고 변화를 향한 북한, 국제사회 벽에 막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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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김대중 정부 지원 속에 대외관계 넒히며 경제개혁 추진
김정은도 문재인 정부에 기대 대미관계 풀고 경제성장 노려
하노이 노딜 후 과거 회귀로 미래 암울…유일한 버팀목은 '시장'
1990년대 중반, 전례 없는 자연재해로 농사를 망치면서 북한의 식량창고는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다.
식량난으로 많은 아사자가 속출한 '고난의 행군' 시기의 시작으로, 6·25전쟁 이후 북한 정권에 닥친 최대 위기였다.
소련을 비롯한 동구 사회주의국가가 잇달아 붕괴하고 북중관계도 한중 수교 이후 원만하지 않은 상황이어서 당시 김정일 정권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우호국가'는 없었다.
북한 입장을 대변하는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2002.4.12자)도 1995년부터 2000년 10월까지 혹심한 식량난으로 "몸이 허약한 환자들이 사망하고 생활고로 인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가 하면 부모 잃은 어린이가 늘어났다"고 소개했다.
그런 가운데 1998년 집권한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3월 독일 국빈 방문 중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준비가 돼 있다"며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와 항구적인 평화 및 남북간 화해·협력을 위한 '베를린 선언'을 전격 발표했다. 김 대통령의 수차례 남북 정상회담 제의를 주시하던 김정일 정권은 베를린선언을 전격 수용했고, 뉴밀레니엄 첫해 6월 15일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정상이 마주 앉게 됐다.
국제사회의 긴급구호와 군부 통치를 앞세운 이른바 '선군정치'로 간신히 체제를 지탱해온 김정일 정권에 남측의 제안을 수용하는 것외에는 다른 탈출구가 없었던 셈이다.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은 김정일 정권이 국제사회의 고립에서 벗어나 정상국가로 발돋움하고 경제난에서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다.
중국·러시아와 잇단 정상회담으로 전통 우방관계를 회복하고 숙원이던 독일·영국·캐나다 등 10여개 유럽연합(EU) 및 서방국가와 대사관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며 아시아·태평양지역 유일의 안보협의체인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회원국으로 정식 가입하며 외교 무대를 넓혔다.
특히 조명록 당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겸 군 총정치국장이 북한의 고위관리로는 처음으로 그해 10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로 미국을 방문해 빌 클린턴 대통령을 면담하고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하면서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됐던 양국관계의 정상화를 향한 걸음을 내디뎠다.
2002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집권으로 잠시 휘청거렸던 북미관계도 남측의 지원 속에 핵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과 대화를 이어갔다. 내부적으로는 남측의 후원에 힘입어 고난의 행군에서 탈출하며 경제 성장을 이루기 위한 '시장 지향적 조치'에 나섰다.
실리와 '신사고'를 제창하며 '바꿔 열풍'도 거세게 불었다.
대표적인 것이 2002년 '7·1경제관리개선조치'(7·1조치)였다.
대기근 과정에서 음성적으로 자리 잡은 시장경제 요소를 국가가 공식 수용한 조치로 임금·물가 현실화, 환율 인상·배급제 축소, 사회보장 축소, 인센티브제 도입 등이 골자였다.
7·1조치가 나온 11월에는 북한의 핵심 경제관료들이 대거 포함된 고위급 경제시찰단이 남한을 방문했다.
말 그대로 남측의 경제발전 상황을 직접 살펴보고 따라배우기 위한 8박 9일간의 긴 일정이었다.
한편으로 곡물과 공산품 등 모든 품목을 거래할 수 있는 종합시장이 합법적으로 운영되면서 남측의 방대한 지원물품은 시장의 최고 인기 품목으로 공공연히 거래되고 사회 전반에 대남 환상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2008년 핵문제의 우선 해결을 앞세운 이명박 정권에 이어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고 북한의 천안함 폭침과 잇단 핵실험 및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로 한반도 평화와 경제 협력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남북 및 북미간 대립이 심화하는 가운데 북한 경제 성장의 디딤돌이었던 7·1조치도 갈지자 행보를 거듭하며 체제 유지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되는 조치들이 사라져버렸다. 김정일 위원장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권좌에 오른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집권 초기 권력 공고화에 집중하면서도 7·1조치를 대폭 보강한 '사회주의 기업책임관리제'를 실시, 생산·판매·투자 등 경영활동에서 기업의 자율성과 재량권을 확대한 '김정은식 시장경제' 정책을 폈다.
이 역시 핵실험과 ICBM 발사에 따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전방위적이고 촘촘한 대북제재에 막혀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결국 김정은 위원장은 아버지 김정일 위원장처럼 정상회담을 통해 남쪽의 문재인 정부의 손을 잡고 미국을 설득해 낙후한 경제를 살려 나가려고 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2018년 4월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집권 초기 내세웠던 '핵·경제 병진노선'을 과감히 접고 '경제건설 총력집중' 노선을 대내에 선언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영변 핵시설 폐기 등을 앞세워 제재를 풀고 경제성장에 올인하려던 북한의 야심 찬 꿈은 하노이 노딜로 좌절했고 김정은 위원장은 지도력과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김 위원장은 집권 직후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던 약속도 뒤집고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나라의 존엄을 지키겠다"며 핵전쟁억제력과 자력갱생에 의한 정면돌파전을 선언, 과거로 회귀했다.
시장이 김정은 체제의 버팀목이 되고 있지만, 안보를 위한 핵포기 결심이 미뤄지면서 더욱이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세계적 확산으로 경제난이 가중되면서 장래는 더욱더 어두워 보인다.
/연합뉴스
김정은도 문재인 정부에 기대 대미관계 풀고 경제성장 노려
하노이 노딜 후 과거 회귀로 미래 암울…유일한 버팀목은 '시장'
1990년대 중반, 전례 없는 자연재해로 농사를 망치면서 북한의 식량창고는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다.
식량난으로 많은 아사자가 속출한 '고난의 행군' 시기의 시작으로, 6·25전쟁 이후 북한 정권에 닥친 최대 위기였다.
소련을 비롯한 동구 사회주의국가가 잇달아 붕괴하고 북중관계도 한중 수교 이후 원만하지 않은 상황이어서 당시 김정일 정권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우호국가'는 없었다.
북한 입장을 대변하는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2002.4.12자)도 1995년부터 2000년 10월까지 혹심한 식량난으로 "몸이 허약한 환자들이 사망하고 생활고로 인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가 하면 부모 잃은 어린이가 늘어났다"고 소개했다.
그런 가운데 1998년 집권한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3월 독일 국빈 방문 중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준비가 돼 있다"며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와 항구적인 평화 및 남북간 화해·협력을 위한 '베를린 선언'을 전격 발표했다. 김 대통령의 수차례 남북 정상회담 제의를 주시하던 김정일 정권은 베를린선언을 전격 수용했고, 뉴밀레니엄 첫해 6월 15일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정상이 마주 앉게 됐다.
국제사회의 긴급구호와 군부 통치를 앞세운 이른바 '선군정치'로 간신히 체제를 지탱해온 김정일 정권에 남측의 제안을 수용하는 것외에는 다른 탈출구가 없었던 셈이다.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은 김정일 정권이 국제사회의 고립에서 벗어나 정상국가로 발돋움하고 경제난에서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다.
중국·러시아와 잇단 정상회담으로 전통 우방관계를 회복하고 숙원이던 독일·영국·캐나다 등 10여개 유럽연합(EU) 및 서방국가와 대사관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며 아시아·태평양지역 유일의 안보협의체인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회원국으로 정식 가입하며 외교 무대를 넓혔다.
특히 조명록 당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겸 군 총정치국장이 북한의 고위관리로는 처음으로 그해 10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로 미국을 방문해 빌 클린턴 대통령을 면담하고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하면서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됐던 양국관계의 정상화를 향한 걸음을 내디뎠다.
2002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집권으로 잠시 휘청거렸던 북미관계도 남측의 지원 속에 핵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과 대화를 이어갔다. 내부적으로는 남측의 후원에 힘입어 고난의 행군에서 탈출하며 경제 성장을 이루기 위한 '시장 지향적 조치'에 나섰다.
실리와 '신사고'를 제창하며 '바꿔 열풍'도 거세게 불었다.
대표적인 것이 2002년 '7·1경제관리개선조치'(7·1조치)였다.
대기근 과정에서 음성적으로 자리 잡은 시장경제 요소를 국가가 공식 수용한 조치로 임금·물가 현실화, 환율 인상·배급제 축소, 사회보장 축소, 인센티브제 도입 등이 골자였다.
7·1조치가 나온 11월에는 북한의 핵심 경제관료들이 대거 포함된 고위급 경제시찰단이 남한을 방문했다.
말 그대로 남측의 경제발전 상황을 직접 살펴보고 따라배우기 위한 8박 9일간의 긴 일정이었다.
한편으로 곡물과 공산품 등 모든 품목을 거래할 수 있는 종합시장이 합법적으로 운영되면서 남측의 방대한 지원물품은 시장의 최고 인기 품목으로 공공연히 거래되고 사회 전반에 대남 환상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2008년 핵문제의 우선 해결을 앞세운 이명박 정권에 이어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고 북한의 천안함 폭침과 잇단 핵실험 및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로 한반도 평화와 경제 협력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남북 및 북미간 대립이 심화하는 가운데 북한 경제 성장의 디딤돌이었던 7·1조치도 갈지자 행보를 거듭하며 체제 유지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되는 조치들이 사라져버렸다. 김정일 위원장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권좌에 오른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집권 초기 권력 공고화에 집중하면서도 7·1조치를 대폭 보강한 '사회주의 기업책임관리제'를 실시, 생산·판매·투자 등 경영활동에서 기업의 자율성과 재량권을 확대한 '김정은식 시장경제' 정책을 폈다.
이 역시 핵실험과 ICBM 발사에 따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전방위적이고 촘촘한 대북제재에 막혀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결국 김정은 위원장은 아버지 김정일 위원장처럼 정상회담을 통해 남쪽의 문재인 정부의 손을 잡고 미국을 설득해 낙후한 경제를 살려 나가려고 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2018년 4월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집권 초기 내세웠던 '핵·경제 병진노선'을 과감히 접고 '경제건설 총력집중' 노선을 대내에 선언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영변 핵시설 폐기 등을 앞세워 제재를 풀고 경제성장에 올인하려던 북한의 야심 찬 꿈은 하노이 노딜로 좌절했고 김정은 위원장은 지도력과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김 위원장은 집권 직후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던 약속도 뒤집고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나라의 존엄을 지키겠다"며 핵전쟁억제력과 자력갱생에 의한 정면돌파전을 선언, 과거로 회귀했다.
시장이 김정은 체제의 버팀목이 되고 있지만, 안보를 위한 핵포기 결심이 미뤄지면서 더욱이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세계적 확산으로 경제난이 가중되면서 장래는 더욱더 어두워 보인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