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IT 공급망 전쟁은 시작됐다
메모리 반도체 D램은 1970년 미국 인텔이 개발했다. 인텔과 모토로라, 텍사스인스트루먼트 등은 1970년대 메모리를 만들던 곳이다. 하지만 소득이 높아지자 미국은 수없는 반복 작업을 해야 하는 메모리를 포기했다. ‘일벌레’ 일본이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인텔은 중앙처리장치(CPU)로 방향을 틀었다. 1980년대 메모리는 NEC, 히타치, 도시바 등 일본 기업이 휩쓸었다.

주도권을 한국으로 가져온 게 삼성과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다. 이들은 야전침대를 펴놓고 ‘월화수목금금금’ 일하며 일본을 추격했다. 삼성전자가 64메가 D램을 개발해 도시바를 제치고 세계 1위에 오른 게 1992년이다. 1990년대 말 대만이 한국을 쫓아왔다. 하지만 한국은 주도권을 내주지 않았다. 파운드리업계의 맹주 TSMC를 가진 대만이지만 메모리 사업에선 천문학적 투자에도 분루를 삼켰다.

2000년대 초반 디스플레이가 브라운관에서 평면으로 진화할 때 LG, 삼성 등은 과감한 투자에 나섰다. 전략은 주효했고 LCD(액정표시장치)에서도 주도국이 됐다. 세계 TV 시장을 주름잡던 일본의 소니, 파나소닉, 도시바 등이 몰락한 게 그때다.

공급망 내 지위가 國富 갈라

정보기술(IT)의 시대가 개화되자 한국은 메모리와 LCD 시장을 호령했고, 한국의 국민소득은 가파르게 올라갔다. 1인당 국민소득은 2000년 1만달러를 넘었고, 2010년엔 2만달러를 돌파했다.

메모리, LCD 등은 2007년 스마트폰의 등장과 함께 가치가 더 높아졌다. 범용이던 메모리는 스마트폰에 들어가며 ‘맞춤형’이 됐다. 제조업체의 힘이 커지고 값도 올라갔다. 디스플레이에선 LCD를 OLED(유기발광다이오드)로 진화시켜 주도권을 지켰다. IT 먹이사슬의 최고봉에 있는 애플 아이폰에 한국산 부품이 절반 가까이 들어가게 된 이유다.

글로벌 IT 공급망을 부가가치 측면에서 보면 최상위의 소프트웨어는 미국, 소재·장비는 일본, 메모리·OLED 등 핵심 부품은 한국이 만드는 구조다. 가장 밑의 조립 및 저가 범용 부품을 중국, 베트남 등이 맡고 있다. 공급망의 윗부분에 있을수록 더 잘사는 구조다. 중국이 2014년 ‘중국제조 2025’ 계획을 꺼내든 건 공급망의 윗단으로 올라가겠다는 의지였다. 한국이 글로벌 IT 공급망의 윗부분을 차지한 건 우연이 아니다. 기업인의 미래를 내다본 투자, 산업 역군들의 희생과 노력 그리고 국가 지원이 어우러진 결과다.

향후 수십 년을 결정할 지금

이런 글로벌 IT 공급망이 격변의 시대를 맞았다. 미국에선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시켜 세계 공급망에 편입시킨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는 반성이 많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공급망 혼란이 발생하자 이번에 아예 공급망을 자국과 동맹국으로 옮기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특히 인공지능(AI), 5세대(5G) 통신망 등에서 없어선 안 될 반도체 제조업을 다시 키우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중국도 맞대응하고 있다. 제조 2025에 이어 ‘중국판 뉴딜’을 들고나왔다. 두 나라는 한국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나섰다. 미국은 반중(反中) 경제블록구상인 ‘경제번영네트워크(EPN)’에 동참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한국은 변화의 시기를 맞았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최근 언론기고에서 “공중보건의 위기는 일시적일 수 있지만, 정치·경제의 격변은 세대에 걸쳐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기업과 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전략을 짜야 한다. 향후 수십 년이 결정될 수 있는 시기가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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