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 시대에서 빠른 물고기가 느린 물고기를 잡아먹는 시대로 바뀌고 있다.”

임정배 대상 사장(59)은 2017년 취임 직후 직원들에게 ‘빠른 물고기론’을 소개했다. 64년 역사의 종합식품기업 대상이 100년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속도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이를 위해 실행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기회가 왔을 때 이를 제대로 포착하려면 빠른 실행력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로부터 3년 뒤. 대상은 그의 주문대로 ‘빠른 물고기’로 변신했다. 신제품 출시 주기는 절반으로 짧아졌고 품목도 다양해졌다. 종가집 김치와 간편식 ‘안주야’ 등은 1등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1956년 출시된 ‘미원’은 2030세대에서 인기 발효 조미료로 다시 태어났다.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미국 등 해외 시장에서도 약진하며 대상은 올해 처음 연매출 3조원 돌파를 앞두고 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롤모델’ 선배

임 사장은 직원 사이에서 가장 이상적인 ‘롤모델’로 꼽히는 인물이다. 숫자에 능한 ‘전략가’이자 따뜻한 소통 능력을 지닌 ‘덕장’으로 평가받는다. 1991년 미원통상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해외 영업과 재무 기획 등 그룹의 전략을 짜는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다. 최고재무책임자(CFO) 재직 당시 회사 재무구조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미원에서 대상으로 사명이 바뀌던 1997년엔 사내 경영혁신 운동을 주도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20여 년 만에 회사 최고경영자(CEO)에 올랐다.

임 사장이 경영에 두각을 나타낸 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였다. 회사 재무팀장을 맡은 2007년은 개인적으로나 조직에 최악의 시기였다. 회사 부채 비율이 134%까지 오르고, 회사채 신용등급은 BBB+ 수준으로 떨어졌다. 2008년엔 미국 리먼브러더스 사태 등 대외 환경도 악화됐다. 그는 근본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9년부터 원료 수급에서 제품 출하, 유통까지 전 단계에 걸쳐 생산 효율을 높였다. 비효율적인 관행을 차례로 걷어냈다. 그 덕분에 2013년 말 부채 비율은 105%로 떨어졌고, 회사채 등급도 A+로 두 단계 상승했다.

그런 와중에도 직원들을 챙겼다. ‘인재가 가장 큰 자산’이라고 스스로 되뇌었다.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고 더 좋은 조직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복장 자율화, 정시 퇴근제, 사내 호칭 개선 등의 제도 도입을 추진했다. “상명하복의 수직적인 기업 문화를 바꾸기 위해 인사 제도 전반을 개편했다”고 그때를 회고했다.

그는 위기 때마다 삶과 조직생활의 원칙이 된 ‘일화’를 떠올렸다고 한다. 이런 얘기다. 류시화 시인이 인도를 여행할 때였다. “영국인들이 과거 식민지 시절 인도에서 골프를 칠 때마다 원숭이가 골프공을 집어가 엉뚱한 곳에 떨어뜨려 놓았답니다. 결국 ‘원숭이가 골프공을 떨어뜨린 자리에서 다시 경기를 이어간다’는 새로운 규칙이 생겼죠. 누군가는 원숭이 덕에 행운을 맛보고, 누군가는 불운을 겪기도 했습니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고,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기도 하지만 ‘공이 떨어진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얘기가 우리 삶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국민에게 맛의 즐거움 알리는 게 대상의 소명”

대상은 최근 2~3년 동안 세상에 없던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냈다. 모두 비슷한 가정간편식(HMR)으로 경쟁할 때 대상은 안주와 야식에 특화한 ‘안주야’를 내놓고 1000억원대의 냉동안주 시장을 개척했다. 이 시장에서 절반가량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톡톡 튀는 마케팅도 화제가 됐다. 미원은 슈퍼주니어 김희철을 모델로 내세운 ‘픽미원’ ‘오쓸레미원’ 등의 광고로 20~30대 소비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다. 베트남 법인은 축구 열풍이 불자 박항서 감독을 가장 먼저 모델로 섭외하기도 했다. 대상 관계자는 “임 사장은 임직원의 아이디어와 이야기를 경청한다”며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와 발 빠른 마케팅은 모두 직원들과의 소통에서 나온 결과”라고 강조했다.

창업자인 고(故) 임대홍 회장은 순수 국내 자본과 고유 기술로 미원을 창업했다. 임 전 회장은 “국민에게 맛의 즐거움을 알리자”고 항상 강조했다. 이런 소명의식이 대상만의 DNA라고 임 사장은 설명했다. 그는 “한국인의 김치 문화를 바꿔놓은 종가집 김치와 마시는 식초 시장을 개척한 홍초 같은 제품이 모두 국민에게 좋은 맛을 알려야 한다는 대상만의 DNA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임 사장은 그런 의미에서 직원들에게 신제품을 기획할 때 “먼저 소비자가 돼라”고 강조한다. 그다음이 거래처와 협력업체, 마지막이 생산자인 대상의 입장이 돼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아무리 뛰어난 기술도 소비자가 가치를 못 느끼면 소용없다”며 “세계를 주름잡았던 일본 가전업체가 몰락하는 사이 소비자 욕구를 꾸준히 살핀 한국 가전업체는 세계를 호령하고 있다”고 말했다.

‘운9기1’의 시대…“준비만이 살길”

임 사장에게는 오래된 습관이 있다. 꼼꼼히 메모하는 것이다. 1990년대 유럽 주재원 시절 생긴 습관이다. 당시 대형 바이어를 무조건 찾아가 계약 협상을 했다. 3분의 시간이 주어졌지만 정작 두서없는 말만 늘어놨고 협상은 당연히 실패로 끝났다. 그는 “오래전 일이지만 아직도 가장 창피한 순간으로 기억된다”며 “이후 모든 미팅에 앞서 경쟁사에 대한 분석, 대상의 강점 등을 논리정연하게 준비하게 됐다”고 말했다.

임 사장은 “CEO가 된 이후 이 습관이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했다. “운7기3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제 ‘운9기1’의 시대”라며 “해를 거듭할수록 기회는 쉽게 오지 않지만 그 10%의 기회를 제대로 잡으려면 완벽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4~5년이 대상에는 ‘준비의 시간’이었다고 소개했다. 온라인 유통채널 강화, 글로벌 사업 강화, 간편식 등에 집중했다. 최근 그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온라인 전문 브랜드와 공식 쇼핑몰을 강화한 것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를 맞아 성장의 발판이 됐다.

해외 사업도 성장의 큰 축이다. 대상은 올해 글로벌 식품사업을 20% 성장시킨다는 목표다. 내년부터 미국 현지 공장에서 김치를 생산할 계획이다. 중국에서는 베이징과 톈진에 이어 롄윈강에 세 번째 공장을 짓고 있다.

임 대표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강조한다. 주 52시간 근로제, 정시 퇴근제 정착을 위해 PC오프제 등을 도입했다. 스스로도 ‘멋지게 잘 쉬는 CEO’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중년 남성 세 명이 2주일간 여행을 떠나는 영화 ‘굿바이 뉴욕, 굿모닝 내 사랑’을 본 뒤 1년에 두 번은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다. 그는 “회사의 대표, 누구의 아버지 또는 남편이 아니라 나 자신을 돌아보는 여행을 통해 삶의 원동력을 얻는다”고 말했다.

■ 임정배 대상 사장

△1961년 서울 출생
△1984년 고려대 식품공학과 졸업
△1991년 미원통상 무역부 입사
△1998년 대상유럽 법인장
△2007년 대상 재무팀장
△2009년 대상 기획관리본부장
△2013년 대상홀딩스 대표이사
△2016년 대상 전략기획본부장
△2017년~ 대상 대표이사 사장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