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통신장비업체 화웨이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미국 반도체 업체들의 '큰손'이자 5세대 이동통신(5G) 국제표준을 주도하고 있는 화웨이에 대한 제재의 수위를 높일수록 오히려 미국 기업들이 받는 피해가 만만치 않아서다.

17일 시장조사업체 스트래티지 애널리틱스(SA)가 최근 발간한 '화웨이 제재: 통신, 글로벌 반도체 및 미국경제에 미칠 악영향' 제하 보고서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화웨이 제재를 강행한다면 미국 반도체 업계는 연간 약 8조원(70억 달러)의 피해를 입을 것으로 전망된다.

화웨이는 미국 반도체 업체들의 'VIP 고객'이다. SA에 따르면 화웨이의 '주문'은 지난해 미국 통신칩 제조사 브로드컴의 연매출 8.7%(20억 달러)를 차지했다. 인텔은 매년 최소 약 1조8000억원(15억 달러)의 데이터센터 칩을 화웨이에 판매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화웨이를 고객사로 둔 마이크론·스카이웍스·구글·퀄컴 등의 업체들도 피해가 예상된다.

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화웨이가 차지하는 비중도 크다. 화웨이는 매년 세계 반도체 시장의 5%가량인 약 24조2300억원(200억 달러) 이상의 반도체를 구매했다. 미국 제재로 화웨이가 글로벌 업체들의 고객사에서 이탈한다면 미국은 물론 전 세계 반도체 기업들의 매출 하락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화웨이는 설명했다.

화웨이가 '미래 먹거리'로 불리는 5G 기술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도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골칫거리다. 이동통신 국제표준화 단체이자 5G 국제표준을 정립하고 있는 국제민간표준화기구(3GPP)의 5G 표준 정립에 대한 기여도 조사에서 화웨이는 지난해 최고 평점을 받았다. 화웨이는 또 전 세계 통신업체 중 가장 많은 5G 관련 기술특허(SEP)를 보유하고 있는 업체이기도 하다. SEP란 특정 사업에 채택된 표준기술을 구현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핵심기술 특허다.

3GPP의 핵심 회원인 화웨이는 자사의 기술력을 토대로 5G 국제표준 설정을 주도하고 있다. 만약 미국이 글로벌 5G 공급망에서 화웨이를 배제하면 미국 기업들은 5G 통신망 구축에 있어서 화웨이에 특허료를 지불해야하는 처지에 놓일 수도 있다. SA는 "전 세계 5G 표준을 정립하는 3GPP의 핵심 회원인 화웨이가 장비를 제공할 수 없으면 5G 인프라를 구축해야 되는 통신사들이 계획에 차질을 입을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이유로 화웨이에 강경했던 미국 정부의 태도도 차츰 바뀌는 모양새다. 미국 정부는 최근 자국 기업들이 5G 네트워크 국제표준 설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화웨이와 협력하는 걸 허용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 상무부는 이미 이같은 내용의 규정 변경에 서명했다. 이르면 17일(현지시간) 관련 내용을 연방관보에 공표할 것으로 보인다.

기술력을 앞세운 화웨이는 5G 표준과 관련 사업에 대한 글로벌 논의를 주도하는 반면 미국 기업들은 오히려 밀려나는 형국이 되자, 종전 제재와 달리 화웨이가 참여하는 5G 기술표준기구에 미국 기업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앞서 미국 정부는 지난해 화웨이를 '블랙리스트'에 올리며 자국 기업들이 화웨이와 거래하지 못하도록 한 바 있다.

미 정부의 이번 규정 변화를 두고 미 포브스지는 "5G 글로벌 표준은 향후 미국의 성장과 경제 수익의 중요한 원동력이 될 것"이라면서도 "(규정 변화는) 화웨이가 5G 표준에 미치는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국 정부가 인정한 것과 다름 없다"이라고 평가했다.

화웨이 관계자는 "미 정부가 화웨이에 대한 제재 규정을 이어간다면 어떠한 미국 업체들도 화웨이가 생산한 라우터, 스위치, 인터넷 서비스, 클라우드 등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배성수 한경닷컴 기자 bae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