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국가부채는 경제 아닌 도덕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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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세대 부담 늘리는 재정살포
정책 실패 메우는 데 급급한
'소비성 빚잔치' 불과할 뿐
'수혜자=부담자'여야 윤리적
'빚폭탄' 떠넘기지 말고
재정건전성 관리 신경써야
민경국 < 강원대 명예교수·자유철학아카데미 원장 >
정책 실패 메우는 데 급급한
'소비성 빚잔치' 불과할 뿐
'수혜자=부담자'여야 윤리적
'빚폭탄' 떠넘기지 말고
재정건전성 관리 신경써야
민경국 < 강원대 명예교수·자유철학아카데미 원장 >
국가부채가 올해 말 900조원 규모로 늘어나 국내총생산(GDP) 대비 45%를 넘어선다. 박근혜 정부 말기인 2016년 말 36%에서 3년 새 10%포인트나 급등하는 것이다. 지난 15일 국회에서는 여야가 국가부채 문제를 놓고 각각 정책 토론회를 열었는데 전혀 다른 진단과 해법이 나왔다. 미래통합당은 “재정건전성이 무너지고 있다”며 국가재정관리가 필요하다는 입장인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재정여력이 충분하다”며 나랏빚을 더 내 씀씀이를 늘려도 괜찮다는 입장이다.
여야가 인식을 같이하는 부분도 있는데, 부채를 재정건전성이라는 경제적 관점에서 다룬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부채가 윤리적으로 정당한가의 문제가 더 근원적이다. 도덕적 정당성이 없는 정책은 실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빚을 통한 정부지출로 편익을 누리는 수혜자와 조세의 형태로 빚을 갚아야 하는 부담자가 상이한 게 나랏빚의 본질이다. 수혜자와 부담자가 각각 누구인지를 보자. 수혜자는 정부를 지지하는 유권자, 공짜로 편익을 주겠다는 약속으로 재선 기회를 높이는 정치인, 그리고 공무원들이다. 부채의 희생자들은 아직 보이지 않고 그래서 주목받지도 못하는 미래세대다.
빚의 수혜자가 동시에 부담자인 게 책임윤리에도 적합하다. 수혜자와 부담자가 분리된 국가부채는 그런 윤리의 위반이다. 빚잔치가 유권자들을 매수하기에 적합한 정치적 수단인 이유가 있다. 책임지는 걸 싫어하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그런 본성을 잘 이용하는 정치세력이 좌파 포퓰리스트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후세대를 희생시켜 현세대의 편익을 증대하는 것은 약탈이다. 미래세대를 저당 잡는 게 나랏빚이다. 이는 인간을 수단만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칸트의 정언명령 위반이다. 부채 부담 전가의 바탕에는 세대 간 체결한 ‘사회계약’이 깔려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세대가 부채와 관련해 미래세대와 계약을 체결한 역사적 사실이 없다. 사회계약이 사회주의적 환청(幻聽)이요 기만인 이유다.
국가부채는 ‘대표 없으면 조세도 없다’는 영국의 대헌장(1215년) 이후 유서 깊은 경구(警句)에 대한 부도덕한 반란이다. 문제가 그뿐이겠는가! 현재의 유권자가 빚잔치를 지지한다면 그들은 발언권이 없는 장래의 납세자와 시민에게 빚덩어리를 넘겨주게 되는데, 이는 문재인 정권이 금과옥조라고 믿는 민주에 대한 모독이다. 물론 전쟁 또는 자연적 재난으로 후세대에 부담의 일부를 전가할 수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경제가 어려워졌다는 이유로 빚잔치를 벌이는 게 그런 것인데, 이는 후세대를 희생시킬 뿐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건전한 경제학의 인식이다.
현세대가 빚을 얻어 자본재 생산에 투자하면 미래세대도 편익을 향유할 수 있다는 이유로 미래세대의 조세 부담은 정당하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는다. 그러나 지난 3년간 문재인 정부의 적자재정은 미래세대의 소득흐름을 확대하는 사회간접자본(SOC)에 대한 투자가 아니었다. 공무원 수 늘리기, 의료복지, 아동수당 등 대형 선심성 정책을 비롯해 탈(脫)원전, 소득주도성장,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로제 등 실정(失政) 메우기를 위한 빚잔치는 소비성 낭비일 뿐이다.
소비성 빚잔치는 원자재·신소재 개발, 철강·기초과학 등 자본재 생산에 투입될 자원을 소비재 생산부문으로 이동시켜 자본잠식을 야기한다. 자본잠식은 미래세대의 일자리를 줄일 뿐만 아니라 노동생산성도 떨어뜨려 소득이 줄어들게 한다. 문재인 정부의 빚을 통한 복지 해결은 필연적으로 미래세대를 가난하게 하는 것이다. 독일 신학자 겸 반(反)나치운동가였던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가 말했듯이 “후세대를 가난하게 하는 사회야말로 가장 부도덕한 사회”라는 걸 직시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역대 정부는 재정적 신중의 규칙을 지켰다. 적자예산은 금기였다. 역대 정부가 어렵사리 지켜온 불문율을 문재인 정권이 깨버리고 있다. 빚으로 복지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국가부채 비율 60%도 괜찮다”는 말까지 나오는 판이다. 그것이 미래세대를 가난하게 하는 부도덕한 재정혁명이 아니고 무엇인가.
여야가 인식을 같이하는 부분도 있는데, 부채를 재정건전성이라는 경제적 관점에서 다룬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부채가 윤리적으로 정당한가의 문제가 더 근원적이다. 도덕적 정당성이 없는 정책은 실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빚을 통한 정부지출로 편익을 누리는 수혜자와 조세의 형태로 빚을 갚아야 하는 부담자가 상이한 게 나랏빚의 본질이다. 수혜자와 부담자가 각각 누구인지를 보자. 수혜자는 정부를 지지하는 유권자, 공짜로 편익을 주겠다는 약속으로 재선 기회를 높이는 정치인, 그리고 공무원들이다. 부채의 희생자들은 아직 보이지 않고 그래서 주목받지도 못하는 미래세대다.
빚의 수혜자가 동시에 부담자인 게 책임윤리에도 적합하다. 수혜자와 부담자가 분리된 국가부채는 그런 윤리의 위반이다. 빚잔치가 유권자들을 매수하기에 적합한 정치적 수단인 이유가 있다. 책임지는 걸 싫어하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그런 본성을 잘 이용하는 정치세력이 좌파 포퓰리스트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후세대를 희생시켜 현세대의 편익을 증대하는 것은 약탈이다. 미래세대를 저당 잡는 게 나랏빚이다. 이는 인간을 수단만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칸트의 정언명령 위반이다. 부채 부담 전가의 바탕에는 세대 간 체결한 ‘사회계약’이 깔려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세대가 부채와 관련해 미래세대와 계약을 체결한 역사적 사실이 없다. 사회계약이 사회주의적 환청(幻聽)이요 기만인 이유다.
국가부채는 ‘대표 없으면 조세도 없다’는 영국의 대헌장(1215년) 이후 유서 깊은 경구(警句)에 대한 부도덕한 반란이다. 문제가 그뿐이겠는가! 현재의 유권자가 빚잔치를 지지한다면 그들은 발언권이 없는 장래의 납세자와 시민에게 빚덩어리를 넘겨주게 되는데, 이는 문재인 정권이 금과옥조라고 믿는 민주에 대한 모독이다. 물론 전쟁 또는 자연적 재난으로 후세대에 부담의 일부를 전가할 수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경제가 어려워졌다는 이유로 빚잔치를 벌이는 게 그런 것인데, 이는 후세대를 희생시킬 뿐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건전한 경제학의 인식이다.
현세대가 빚을 얻어 자본재 생산에 투자하면 미래세대도 편익을 향유할 수 있다는 이유로 미래세대의 조세 부담은 정당하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는다. 그러나 지난 3년간 문재인 정부의 적자재정은 미래세대의 소득흐름을 확대하는 사회간접자본(SOC)에 대한 투자가 아니었다. 공무원 수 늘리기, 의료복지, 아동수당 등 대형 선심성 정책을 비롯해 탈(脫)원전, 소득주도성장,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로제 등 실정(失政) 메우기를 위한 빚잔치는 소비성 낭비일 뿐이다.
소비성 빚잔치는 원자재·신소재 개발, 철강·기초과학 등 자본재 생산에 투입될 자원을 소비재 생산부문으로 이동시켜 자본잠식을 야기한다. 자본잠식은 미래세대의 일자리를 줄일 뿐만 아니라 노동생산성도 떨어뜨려 소득이 줄어들게 한다. 문재인 정부의 빚을 통한 복지 해결은 필연적으로 미래세대를 가난하게 하는 것이다. 독일 신학자 겸 반(反)나치운동가였던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가 말했듯이 “후세대를 가난하게 하는 사회야말로 가장 부도덕한 사회”라는 걸 직시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역대 정부는 재정적 신중의 규칙을 지켰다. 적자예산은 금기였다. 역대 정부가 어렵사리 지켜온 불문율을 문재인 정권이 깨버리고 있다. 빚으로 복지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국가부채 비율 60%도 괜찮다”는 말까지 나오는 판이다. 그것이 미래세대를 가난하게 하는 부도덕한 재정혁명이 아니고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