얽매일 게 없는데…리키는 왜 '과로의 굴레'에 빠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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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노믹스 (11) 미안해요 리키 (上)
"실적·목표·근태관리 없어요…알아서 일하세요"
"실적·목표·근태관리 없어요…알아서 일하세요"
“고용 계약 같은 거 없고 목표 실적도 없어요. 출근 카드도 없고 알아서 일합니다. 자신 있어요?” “그럼요! 이런 기회를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영화 ‘미안해요 리키’는 리키(크리스 히친 분)가 택배기사로 일하기 위해 면접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리키의 새 일자리는 법정 근로시간 기준도 없고, 정해진 월급도 없다. 대신 배송한 건수에 따라 수수료를 받는다. 회사 매니저는 리키에게 “채용되는 게 아니라 합류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금융위기 때 직장을 잃고 일용직을 전전하던 리키는 이 기회를 ‘생명줄’처럼 붙잡는다. 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을 얻을 것이란 희망에 가득차서다.
‘플랫폼’이 만든 일자리
리키의 가족은 네 명. 마음씨 따뜻한 아내 애비(데비 허니우드 분)와 고등학생 아들, 중학생 딸이 있다. 새로 시작한 택배 일은 리키에겐 가족을 지킬 유일한 방법이다. 리키는 아침 7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쉬지 않고 일한다. 미술에 재능이 있는 아들을 대학에 보내고, 착하고 똑똑한 딸도 남부럽지 않게 키울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당신은 고용된 기사가 아니라 서비스 제공자”라는 매니저의 말에 리키는 한껏 고무된다.
그가 택배 일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받은 것은 손바닥만 한 단말기다. 매니저는 신신당부한다. “이건 ‘심장’ 같은 겁니다. 시스템에 등록돼 배송이 완료될 때까지 추적되죠. 배송 경로도 짜줄 거예요.” 단말기는 디지털 플랫폼을 상징한다. 리키에게 사무실 같은 전통적인 작업장은 없다. 대신 단말기를 통해 외부에서 업무를 수행한다. 리키가 찾는 택배 수요도 이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관리된다.
리키가 일하는 방식은 ‘플랫폼 노동’이라고 불린다. 플랫폼의 중개를 통해 일감을 찾고, 건당 보수를 받으며, 고용 계약을 체결하지 않고 독립사업자 방식으로 일하는 근로 형태다. 플랫폼 기업은 빅데이터 등을 수집해 택배 수요자와 기사를 직접 연결한다. 리키가 수령인에게 택배를 전달하면서 서명을 위해 단말기를 내밀자 수령인은 툭 내뱉는다. “개인정보를 몽땅 수집해서 그 까만 기계에 넣잖아요. 서명하면 이제 나한테 야한 잡지가 날아올걸요.”
애비가 14시간씩 일하는 까닭
리키가 일을 시작하면서 아내인 애비도 꿈에 부푼다. 오랜 월세살이를 청산하고 ‘내 집’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도 품는다. 리키 같은 플랫폼 노동자들이 일하는 시장을 ‘긱(Gig) 이코노미’라고 한다. ‘긱’이란 단어는 1920년대 미국 재즈클럽에서 섭외한 단기 연주자를 불렀던 말이다. ‘긱’들은 공연을 건별로 계약하고, 공연장에 있는 악기가 아니라 자신의 악기로 연주했다. 리키 역시 없는 살림에 허리띠를 조여 배송용 승합차를 새로 구입한다. 긱 이코노미는 리키 같은 저숙련 노동자에게 노동시장에 진입할 기회를 제공한다.
요양보호사인 애비가 일하는 방식도 비슷하다. 간병이 필요한 가정을 순회하며 방문 건별로 보수를 받는다. 애비가 하루에 14시간 일하는 것을 보고 누군가 놀라 “하루 8시간 이상 일하는 것은 불법 아니냐”고 묻자 애비는 이렇게 답한다. “‘제로 아워(zero-hour)’ 계약이라서 그런 것 없어요.” 최저 근무시간이 0시간인 계약, 이른바 ‘제로 아워’ 계약은 근무시간이 따로 명시돼 있지 않다. 원칙적으론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다. 리키와 애비가 일반적인 임금 노동자의 법정 근로시간보다 더 오래 일하는 것 역시 빠르게 돈을 모으기 위해 긱 이코노미의 특징을 활용한 것이다.
기업으로서 긱 이코노미는 정규직을 고용할 때 부담해야 할 ‘고정비용’을 줄여준다. 정규 직원을 고용한다면 생산량에 관계없이 월급을 줘야 하기 때문에 보수가 곧 고정비용이 된다. 반면 기업의 비용 중엔 생산량에 따라 달라지는 ‘가변비용’도 있다. 커피 회사로 치면 원두, 우유, 설탕 등 원료 구입 비용이 대표적이다. 리키 같은 인력은 택배량이 줄면 자동으로 보수도 줄어든다. 플랫폼의 발전이 기업의 고정비용을 가변비용화한 셈이다.
노동 공급이 늘면 임금은 줄고
리키는 배송 물량을 받으러 간 어느 날 아침 떠들썩한 상황을 목격한다. 동료 택배기사 중 한 명이 새벽에 사고를 당해 운행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차 수리를 위해 두 시간만 기다려달라는 기사의 요청에 매니저는 매몰차게 답한다. “안 된다. 대체 기사를 쓰겠다.” 플랫폼 노동자의 이면엔 불안정한 처우가 있다. 플랫폼의 효율성을 위해선 고용의 유연성이 어느 정도 담보돼야 하기 때문이다.
플랫폼이 오픈돼 있으면 노동력은 계속 유입된다. 만약 경기 불황으로 직장을 잃은 뒤 택배기사로 일하려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노동은 초과공급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프>에서 노동공급곡선이 S1에서 S2로 이동하면(노동 공급이 증가하면) 임금은 W1에서 W2로 하락한다. 플랫폼 노동자의 임금 인상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이유다.
돈벌이가 급한 리키는 무리한 선택을 한다. 사고 당한 기사의 자리를 꿰찬 것이다. 플랫폼 노동자의 경쟁 상대는 일반적인 임금 노동자 시장과는 다르다. 온라인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경쟁해야 할 때도 많다. 특별한 능력이 있어 우위를 점할 수 있다면 이 같은 경쟁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배송업은 진입장벽이 낮아 경쟁이 치열하다.
고은이 한국경제신문 기자 koko@hankyung.com
NIE 포인트
① 인터넷을 기반으로 수요자와 공급자를 연결해 상품 및 서비스를 거래하도록 장(場· Platform)을 제공하는 플랫폼 산업이 4차 산업혁명의 하나로 급속히 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② 플랫폼 산업 종사자는 특정 회사에 속하지 않고 건당으로 계약하는 독립사업자일까, 하루 8시간 근로 등 노동 3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일까.
③ 코로나19로 인한 언택트(비대면) 문화 확산으로 택배 등 플랫폼 산업이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이 부문 경쟁이 더욱 격화되리라 예상할 수 있을까.
영화 ‘미안해요 리키’는 리키(크리스 히친 분)가 택배기사로 일하기 위해 면접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리키의 새 일자리는 법정 근로시간 기준도 없고, 정해진 월급도 없다. 대신 배송한 건수에 따라 수수료를 받는다. 회사 매니저는 리키에게 “채용되는 게 아니라 합류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금융위기 때 직장을 잃고 일용직을 전전하던 리키는 이 기회를 ‘생명줄’처럼 붙잡는다. 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을 얻을 것이란 희망에 가득차서다.
‘플랫폼’이 만든 일자리
리키의 가족은 네 명. 마음씨 따뜻한 아내 애비(데비 허니우드 분)와 고등학생 아들, 중학생 딸이 있다. 새로 시작한 택배 일은 리키에겐 가족을 지킬 유일한 방법이다. 리키는 아침 7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쉬지 않고 일한다. 미술에 재능이 있는 아들을 대학에 보내고, 착하고 똑똑한 딸도 남부럽지 않게 키울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당신은 고용된 기사가 아니라 서비스 제공자”라는 매니저의 말에 리키는 한껏 고무된다.
그가 택배 일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받은 것은 손바닥만 한 단말기다. 매니저는 신신당부한다. “이건 ‘심장’ 같은 겁니다. 시스템에 등록돼 배송이 완료될 때까지 추적되죠. 배송 경로도 짜줄 거예요.” 단말기는 디지털 플랫폼을 상징한다. 리키에게 사무실 같은 전통적인 작업장은 없다. 대신 단말기를 통해 외부에서 업무를 수행한다. 리키가 찾는 택배 수요도 이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관리된다.
리키가 일하는 방식은 ‘플랫폼 노동’이라고 불린다. 플랫폼의 중개를 통해 일감을 찾고, 건당 보수를 받으며, 고용 계약을 체결하지 않고 독립사업자 방식으로 일하는 근로 형태다. 플랫폼 기업은 빅데이터 등을 수집해 택배 수요자와 기사를 직접 연결한다. 리키가 수령인에게 택배를 전달하면서 서명을 위해 단말기를 내밀자 수령인은 툭 내뱉는다. “개인정보를 몽땅 수집해서 그 까만 기계에 넣잖아요. 서명하면 이제 나한테 야한 잡지가 날아올걸요.”
애비가 14시간씩 일하는 까닭
리키가 일을 시작하면서 아내인 애비도 꿈에 부푼다. 오랜 월세살이를 청산하고 ‘내 집’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도 품는다. 리키 같은 플랫폼 노동자들이 일하는 시장을 ‘긱(Gig) 이코노미’라고 한다. ‘긱’이란 단어는 1920년대 미국 재즈클럽에서 섭외한 단기 연주자를 불렀던 말이다. ‘긱’들은 공연을 건별로 계약하고, 공연장에 있는 악기가 아니라 자신의 악기로 연주했다. 리키 역시 없는 살림에 허리띠를 조여 배송용 승합차를 새로 구입한다. 긱 이코노미는 리키 같은 저숙련 노동자에게 노동시장에 진입할 기회를 제공한다.
요양보호사인 애비가 일하는 방식도 비슷하다. 간병이 필요한 가정을 순회하며 방문 건별로 보수를 받는다. 애비가 하루에 14시간 일하는 것을 보고 누군가 놀라 “하루 8시간 이상 일하는 것은 불법 아니냐”고 묻자 애비는 이렇게 답한다. “‘제로 아워(zero-hour)’ 계약이라서 그런 것 없어요.” 최저 근무시간이 0시간인 계약, 이른바 ‘제로 아워’ 계약은 근무시간이 따로 명시돼 있지 않다. 원칙적으론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다. 리키와 애비가 일반적인 임금 노동자의 법정 근로시간보다 더 오래 일하는 것 역시 빠르게 돈을 모으기 위해 긱 이코노미의 특징을 활용한 것이다.
기업으로서 긱 이코노미는 정규직을 고용할 때 부담해야 할 ‘고정비용’을 줄여준다. 정규 직원을 고용한다면 생산량에 관계없이 월급을 줘야 하기 때문에 보수가 곧 고정비용이 된다. 반면 기업의 비용 중엔 생산량에 따라 달라지는 ‘가변비용’도 있다. 커피 회사로 치면 원두, 우유, 설탕 등 원료 구입 비용이 대표적이다. 리키 같은 인력은 택배량이 줄면 자동으로 보수도 줄어든다. 플랫폼의 발전이 기업의 고정비용을 가변비용화한 셈이다.
노동 공급이 늘면 임금은 줄고
리키는 배송 물량을 받으러 간 어느 날 아침 떠들썩한 상황을 목격한다. 동료 택배기사 중 한 명이 새벽에 사고를 당해 운행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차 수리를 위해 두 시간만 기다려달라는 기사의 요청에 매니저는 매몰차게 답한다. “안 된다. 대체 기사를 쓰겠다.” 플랫폼 노동자의 이면엔 불안정한 처우가 있다. 플랫폼의 효율성을 위해선 고용의 유연성이 어느 정도 담보돼야 하기 때문이다.
플랫폼이 오픈돼 있으면 노동력은 계속 유입된다. 만약 경기 불황으로 직장을 잃은 뒤 택배기사로 일하려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노동은 초과공급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프>에서 노동공급곡선이 S1에서 S2로 이동하면(노동 공급이 증가하면) 임금은 W1에서 W2로 하락한다. 플랫폼 노동자의 임금 인상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이유다.
돈벌이가 급한 리키는 무리한 선택을 한다. 사고 당한 기사의 자리를 꿰찬 것이다. 플랫폼 노동자의 경쟁 상대는 일반적인 임금 노동자 시장과는 다르다. 온라인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경쟁해야 할 때도 많다. 특별한 능력이 있어 우위를 점할 수 있다면 이 같은 경쟁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배송업은 진입장벽이 낮아 경쟁이 치열하다.
고은이 한국경제신문 기자 koko@hankyung.com
NIE 포인트
① 인터넷을 기반으로 수요자와 공급자를 연결해 상품 및 서비스를 거래하도록 장(場· Platform)을 제공하는 플랫폼 산업이 4차 산업혁명의 하나로 급속히 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② 플랫폼 산업 종사자는 특정 회사에 속하지 않고 건당으로 계약하는 독립사업자일까, 하루 8시간 근로 등 노동 3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일까.
③ 코로나19로 인한 언택트(비대면) 문화 확산으로 택배 등 플랫폼 산업이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이 부문 경쟁이 더욱 격화되리라 예상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