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日산업유산, 아시아 1위 자랑 있고 역사 반성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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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유산정보센터 방문기…우월주의에 징용 노동자 피해 외면
도쿄 소재 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에는 아시아 최초로 산업혁명에 성공했다는 자랑은 있지만,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으로 주변국에 피해를 준 역사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
메이지(明治·1868년 10월 23일∼1912년 7월 30일) 시대 자신의 힘으로 산업화를 이뤄냈다는 자부심을 드러내는데 집중한 나머지 산업화 초기 자국 노동자들이 겪은 고생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느낌을 줬다.
역사의식의 빈곤과 자국 우월주의 탓에 조선인 징용 노동자는 물론 자국 노동자의 희생에도 눈을 감은 것으로 보인다.
◇ 일반 관람객 거의 없는 산업유산정보센터
1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1시 20분까지 일본 총무성 제2청사 별관 1층에 있는 산업유산정보센터에는 연합뉴스 기자 1명 외 관람객은 없었다.
기자는 지난달 10일 정보센터에 신청해 이날 일반 관람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관람객이 거의 없는데도 왜 완전 사전 예약제로 운영하는지 의문이 생겼다.
2015년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23개 메이지 산업시설이 전시된 정보센터는 1천78㎡ 크기이며, 3개 구역으로 구분돼 있다.
1구역에 들어서자 세계문화유산 등재 당시 조선인 징용 노동자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적절한 조처를 하겠다는 사토 구니(佐藤地) 주(駐)유네스코 일본대사의 발언이 적힌 패널에 가장 먼저 시선이 갔다.
이후 정보센터 안내원 2명은 기자에게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의 개항 요구 이후 일본의 초기 산업화 과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페리 제독이 타고 온 군함의 크기에 당시 일본인들은 충격을 받아 조선업을 발전시켰고, 철로 배를 만들기 위해 철강 산업을 육성했으며, 많은 젊은이가 산업화의 길을 배우기 위해 구미(歐美)로 유학을 떠났다는 취지의 설명이었다.
◇ "산업혁명 아시아에서 가장 빨랐다"
나이가 지긋한 한 안내원은 일본의 산업혁명은 1860년대 시작됐고 아시아에서 가장 빨랐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산업혁명은 언제부터냐'는 안내원의 질문에 기자는 "본격적인 산업화는 1960년대부터"라고 답변했다.
일본이 100년이나 빨랐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의도 같았다.
구미의 산업을 배우기 위해 유학길에 오른 5명의 젊은이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안중근 의사가 저격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도 있었다.
2구역에선 대형 화면과 패널을 통해 조선, 제철·철강, 석탄 등 분야별로 메이지 시대의 본격적인 산업화를 다루고 있었다.
2018년 10월 한국인 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하라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받은 미쓰비시(三菱)는 메이지 시대 대표적인 기업으로 소개돼 있었다.
◇ 산업시설은 있지만, 노동자 삶은 없다
주요 산업의 발전 경로와 시설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메이지 시대 일본 노동자들의 삶은 거의 다루고 있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일본의 시민단체에서도 산업유산정보센터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나 나오고 있다.
바야시 히사토모(小林久公) 강제동원진상규명 네트워크 사무국 차장은 지난달 16일 연합뉴스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일본이 (메이지 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 당시 세계유산위원회에) 약속한 '역사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전시가 필요하며, 일본의 산업혁명을 뒷받침한 노동자들을 전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마지막 3구역에 조선인 징용 현장이기도 한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 탄광에서 일한 노동자와 그 가족의 사진들이 전시돼 있기는 하다.
문제는 일본 정부가 당초 약속한 조선인 징용 노동자의 희생을 기리기보다는 노예노동이 없었고, 조선인에 대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 군함도에서 조선인 차별은 없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어린 시절을 군함도에서 보낸 재일교포 2세 스즈키 후미오(鈴木文雄) 씨의 증언 동영상이 대표적이다.
스즈키 씨는 동영상에서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나는 괴롭힘을 당한 적이 없다"며 "오히려 귀여움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는 '채찍으로 맞았냐' 질문에도 "당시 조금이라도 탄을 많이 캐는 것이 나라의 정책이었다"며 "채찍으로 때리는 것이 가능했겠느냐"고 반문했다.
스즈키 씨의 아버지는 군함도 탄광촌에서 '오장'(팀장급 관리자)으로 일했고, 그는 아버지의 경험에 기초해 증언했다고 한다.
지난달 15일 정보센터 일반 공개 이후 추가로 전시된 패널에도 '진실의 역사를 추구하는 하시마 도민회'(이하 도민회)의 마쓰모토 사카에(松本榮·93) 명예회장이 당시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차별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증언이 소개됐다.
군함도 탄광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마쓰모토 명예회장은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는 조선인은 일본의 국민"이라며 "조선인과 일본 국내인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었겠는가.
하시마 탄광에서도 그랬다"고 주장했다.
◇ "조선인 징용 노동자 수기 공개하겠다"
3구역에선 가토 고코(加藤康子) 산업유산정보센터 센터장과 그의 비서, 하시마(군함도) 도민회 관계자 2명 등 총 4명이 연합뉴스 기자 1명을 상대로 열성적으로 군함도는 '지옥도'가 아니었다는 점을 설득하려고 했다.
한국 영화 '군함도'에 묘사된 가혹한 노동 환경은 사실과 다르며, 1943~1945년 군함도에서 한국인 징용 노동자 122명이 사망했다는 한국 언론의 보도도 틀렸다고 주장했다.
가토 센터장은 조선인 징용 노동자의 희생을 기리는 내용이 정보센터에 없다는 지적과 관련해서는 징용 노동자가 작성한 수기를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수기의 내용을 묻자 '조선인 징용 노동자의 생활'에 관한 내용이라고만 답하고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기자가 '세계 최초로 산업혁명에 성공한 영국의 박물관에도 노동자들이 당시 겪은 고통을 보여주는 전시물이 있는데, 정보센터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지적하자, 가토 센터장은 대형 화면을 통해 파업과 노동자 및 그 가족의 생활상 등이 담긴 사진 자료를 보여줬다.
사진에는 노동자 일상생활 등이 담겨 있었는데, 사토 유네스코 일본대사도 인정한 '가혹한 노동조건'과는 거리가 있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하시마 도민회 관계자는 2015년 7월 사토 대사가 "조선인이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로 노역했다"고 발언한 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잘못 얘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보센터 관련 서적을 모아놓은 책장에는 이영훈 씨 등이 집필한 '반일 종족주의' 일본어판이 꽂혀 있었다.
이 책을 전시한 이유를 묻자 "일본 측과 같은 입장이기 때문"이라고 도민회 관계자는 설명했다.
책장에는 수백 권의 서적이 배치돼 있다.
일본 시민단체인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편찬한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이라는 피해자 증언집도 있다.
/연합뉴스
메이지(明治·1868년 10월 23일∼1912년 7월 30일) 시대 자신의 힘으로 산업화를 이뤄냈다는 자부심을 드러내는데 집중한 나머지 산업화 초기 자국 노동자들이 겪은 고생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느낌을 줬다.
역사의식의 빈곤과 자국 우월주의 탓에 조선인 징용 노동자는 물론 자국 노동자의 희생에도 눈을 감은 것으로 보인다.
◇ 일반 관람객 거의 없는 산업유산정보센터
1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1시 20분까지 일본 총무성 제2청사 별관 1층에 있는 산업유산정보센터에는 연합뉴스 기자 1명 외 관람객은 없었다.
기자는 지난달 10일 정보센터에 신청해 이날 일반 관람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관람객이 거의 없는데도 왜 완전 사전 예약제로 운영하는지 의문이 생겼다.
2015년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23개 메이지 산업시설이 전시된 정보센터는 1천78㎡ 크기이며, 3개 구역으로 구분돼 있다.
1구역에 들어서자 세계문화유산 등재 당시 조선인 징용 노동자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적절한 조처를 하겠다는 사토 구니(佐藤地) 주(駐)유네스코 일본대사의 발언이 적힌 패널에 가장 먼저 시선이 갔다.
이후 정보센터 안내원 2명은 기자에게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의 개항 요구 이후 일본의 초기 산업화 과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페리 제독이 타고 온 군함의 크기에 당시 일본인들은 충격을 받아 조선업을 발전시켰고, 철로 배를 만들기 위해 철강 산업을 육성했으며, 많은 젊은이가 산업화의 길을 배우기 위해 구미(歐美)로 유학을 떠났다는 취지의 설명이었다.
◇ "산업혁명 아시아에서 가장 빨랐다"
나이가 지긋한 한 안내원은 일본의 산업혁명은 1860년대 시작됐고 아시아에서 가장 빨랐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산업혁명은 언제부터냐'는 안내원의 질문에 기자는 "본격적인 산업화는 1960년대부터"라고 답변했다.
일본이 100년이나 빨랐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의도 같았다.
구미의 산업을 배우기 위해 유학길에 오른 5명의 젊은이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안중근 의사가 저격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도 있었다.
2구역에선 대형 화면과 패널을 통해 조선, 제철·철강, 석탄 등 분야별로 메이지 시대의 본격적인 산업화를 다루고 있었다.
2018년 10월 한국인 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하라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받은 미쓰비시(三菱)는 메이지 시대 대표적인 기업으로 소개돼 있었다.
◇ 산업시설은 있지만, 노동자 삶은 없다
주요 산업의 발전 경로와 시설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메이지 시대 일본 노동자들의 삶은 거의 다루고 있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일본의 시민단체에서도 산업유산정보센터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나 나오고 있다.
바야시 히사토모(小林久公) 강제동원진상규명 네트워크 사무국 차장은 지난달 16일 연합뉴스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일본이 (메이지 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 당시 세계유산위원회에) 약속한 '역사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전시가 필요하며, 일본의 산업혁명을 뒷받침한 노동자들을 전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마지막 3구역에 조선인 징용 현장이기도 한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 탄광에서 일한 노동자와 그 가족의 사진들이 전시돼 있기는 하다.
문제는 일본 정부가 당초 약속한 조선인 징용 노동자의 희생을 기리기보다는 노예노동이 없었고, 조선인에 대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 군함도에서 조선인 차별은 없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어린 시절을 군함도에서 보낸 재일교포 2세 스즈키 후미오(鈴木文雄) 씨의 증언 동영상이 대표적이다.
스즈키 씨는 동영상에서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나는 괴롭힘을 당한 적이 없다"며 "오히려 귀여움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는 '채찍으로 맞았냐' 질문에도 "당시 조금이라도 탄을 많이 캐는 것이 나라의 정책이었다"며 "채찍으로 때리는 것이 가능했겠느냐"고 반문했다.
스즈키 씨의 아버지는 군함도 탄광촌에서 '오장'(팀장급 관리자)으로 일했고, 그는 아버지의 경험에 기초해 증언했다고 한다.
지난달 15일 정보센터 일반 공개 이후 추가로 전시된 패널에도 '진실의 역사를 추구하는 하시마 도민회'(이하 도민회)의 마쓰모토 사카에(松本榮·93) 명예회장이 당시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차별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증언이 소개됐다.
군함도 탄광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마쓰모토 명예회장은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는 조선인은 일본의 국민"이라며 "조선인과 일본 국내인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었겠는가.
하시마 탄광에서도 그랬다"고 주장했다.
◇ "조선인 징용 노동자 수기 공개하겠다"
3구역에선 가토 고코(加藤康子) 산업유산정보센터 센터장과 그의 비서, 하시마(군함도) 도민회 관계자 2명 등 총 4명이 연합뉴스 기자 1명을 상대로 열성적으로 군함도는 '지옥도'가 아니었다는 점을 설득하려고 했다.
한국 영화 '군함도'에 묘사된 가혹한 노동 환경은 사실과 다르며, 1943~1945년 군함도에서 한국인 징용 노동자 122명이 사망했다는 한국 언론의 보도도 틀렸다고 주장했다.
가토 센터장은 조선인 징용 노동자의 희생을 기리는 내용이 정보센터에 없다는 지적과 관련해서는 징용 노동자가 작성한 수기를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수기의 내용을 묻자 '조선인 징용 노동자의 생활'에 관한 내용이라고만 답하고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기자가 '세계 최초로 산업혁명에 성공한 영국의 박물관에도 노동자들이 당시 겪은 고통을 보여주는 전시물이 있는데, 정보센터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지적하자, 가토 센터장은 대형 화면을 통해 파업과 노동자 및 그 가족의 생활상 등이 담긴 사진 자료를 보여줬다.
사진에는 노동자 일상생활 등이 담겨 있었는데, 사토 유네스코 일본대사도 인정한 '가혹한 노동조건'과는 거리가 있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하시마 도민회 관계자는 2015년 7월 사토 대사가 "조선인이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로 노역했다"고 발언한 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잘못 얘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보센터 관련 서적을 모아놓은 책장에는 이영훈 씨 등이 집필한 '반일 종족주의' 일본어판이 꽂혀 있었다.
이 책을 전시한 이유를 묻자 "일본 측과 같은 입장이기 때문"이라고 도민회 관계자는 설명했다.
책장에는 수백 권의 서적이 배치돼 있다.
일본 시민단체인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편찬한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이라는 피해자 증언집도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