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주고려정.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밀주고려정.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나라가 존재하는 중요한 이유는 백성들의 생존을 보장해주고, 삶의 질을 향상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한 나라의 흥망과 정책의 성패를 판단하는 첫 번째 지표는 백성들의 생활과 생존 수준이다.

정변으로 집권한 조선은 명분과 예의, 안빈낙도를 표방하면서 산업을 등한시했다. 농업, 그것도 벼농사에 국한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궁핍했고 삶의 재미가 부족했다. 사회는 활력을 잃고, 문화 또한 빈곤했다. 반대로 시대와 백성들이 선택한 고려는 출발부터 다양한 종류의 산업과 무역이 발달한 국제적인 사회였다.

공무역·민간무역이 활발한 고려

고려는 이미 통일을 성취하기 전인 924년에도 7월에는 상선이, 10월에는 사신선이 황해를 건너가 산둥반도 북부의 등주(펑라이)에서 후당과 무역을 벌였다. 정국이 안정된 11세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분열시대를 통일한 송나라는 운하도시인 동경(카이펑)을 수도로 삼고, 상업과 무역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거란을 의식하고 고려의 편의를 위해 국가항구를 산둥반도의 남단인 판교진(지금 산둥의 고현)으로 옮기고, 무역 업무를 도와주는 ‘시박사’라는 관청까지 설치했다.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킨 후에 군사적으로 압박을 가하자 상업의 중심지를 남쪽으로 옮겼다. 1078년에는 명주(닝보우)에서 먼 바다로 나가는 주산군도로 들어가는 진해(칭하이)에 고려 사신과 상선들을 맞이하는 영빈관을 지었다. 1117년에는 닝보우에 고려사관을 설치했다.

그 시대에는 국가가 사신단 등을 활용해 무역활동에 직접 참여했다. 고려와 송나라는 보통 100명에서 300명이 승선한 선박을 이용해 상당한 규모의 공무역을 했다. 송나라는 고려에 의복, 상아, 물소뿔, 옥제품, 술, 새(鳥), 차, 칠제품, 악기 등을 수출했다. 반면에 고려는 비단, 금제품, 은제품, 나전 세공품, 꽃방석(화문석), 자개박이 그릇, 인삼, 소나무, 부채, 종이, 붓, 먹, 가죽 등 수 천 점을 수출했다. 1078년에는 송나라가 무려 100종이 넘는 품목과 6000건에 달하는 물건을 보냈고, 고려도 역시 그에 버금가는 물건을 보냈다.

무역국가로 성공한 고려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통일신라와 마찬가지로 고려는 민간무역이 발달했다. 기록을 보면 송나라 상인들이 더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012년부터 북송이 멸망하는 1278년까지 266년 동안 무려 129회에 걸쳐 약 5000여 명이 왔다. 송 상인들은 우리 생각과 달리 산둥성이나 장쑤성 북부 해안이 아니라 저장성, 푸젠성, 광둥성 등 주로 강남 출신이었다. 기록된 출발지를 보면 푸젠 성남부의 천주(대만 건너)가 19회, 그 위의 복주가 2회, 저장성의 영파인 명주가 3회 등이다. 1090년 이후에도 훗날 마르코폴로가 세계 최고라고 극찬한 천주항의 상인들이 20회 이상 왔다.

아라비아 상인들도 많이 와서 1024년에는 대식국(이란 및 아라비아 지방)의 상인 100여 명이 한 번에 왔다. 다음 해인 1025년과 1040년에도 대거 방문했다. 주로 향료, 물감, 조미료 등 동남아시아나 인도 지역의 특산물을 중계무역했다. 하지만 마팔국(인도), 삼라곡국(태국), 교지국(베트남) 등의 상인들도 고려에 와서 무역을 했다. 이들의 수입품 중 최고의 인기품목은 고려인삼이었다. 이에 ‘코리아’라는 명칭이 이때 처음 세계에 알려졌다는 이야기들이 있지만, 사실은 고구려(고려)가 처음이다. 외국인 중 일부는 고려에 귀화해 결혼했고, 심지어는 정치나 산업활동에 참여했다. 그 예로, 4대 광종 때 과거제도를 도입하는데 큰 역할을 한 쌍기는 귀화인이었다. (김상기, 《고려시대사》)

동아지중해의 항구도시인 개경
복원된 신안해저유물선.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복원된 신안해저유물선.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한강과 예성강이 경기만과 만나는 강화도 해역은 왕건 세력의 토대였다. 이 곳은 선사시대부터 랴오둥반도와 산둥반도 등과 교류할 때 가장 효율적인 해양환경과 무역환경이 갖춰진 장소였다. 거기다가 정부는 개경 앞인 예선 항에 벽란도(부두)를 설치해 입출항과 하역을 편하게 만들었다. 개경에는 사신과 상인들이 머물면서 무역을 하는 객관들이 오빈관, 영은관, 영선관 등 10여 개나 있었다. 개성은 다양한 인종과 물건들이 모여드는 동아지중해의 유명한 국제도시였다(윤명철, 《한민족의 해양활동이야기 2》).

1123년에 사신단으로 온 송나라의 서긍은 1달간 머물면서 자료를 모아 귀국한 후 '선화봉사 고려도경'이란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책에는 고려의 사회상은 물론 산업, 조선업의 상황과 풍습, 심지어는 일부의 역사까지 기록했다. 첩자 노릇을 확실하게 한 것이다. 그는 사신선들이 개경에 도착했을 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즉 사람들이 몰려들어 큰 저자를 만들고는, 온갖 물건들을 진열했다. 또 해안에는 만 여 명의 사람들이 무기, 갑마, 기치, 의장들을 늘어 세우고, 구경꾼들은 담장처럼 모여 있다고 하였다. 대단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또 '고려사' 악지에는 예성강 하구에서 송나라 상인이 고려 남자와 벌인 내기바둑에서 이겨 부인을 데리고 갔다는 일을 적었다. 물론 고려인들도 적극적으로 많이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들은 여러 도시에 진출해 살았는데, 닝보우에는 사신관도 있었고, 시내 한복판인 진명령에는 고려상인들이 살았다.

그렇다면 대규모의 쌍방무역에서 이익을 본 것은 고려일까, 송나라일까? 전 근대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외교와 무역의 일반적인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익을 본 것은 당연히 고려다. 실제로 그 시대 최고의 문장가이며 관리였던 소동파는 고려와 벌이는 무역에 매우 비판적이어서 부정적인 글을 국가에 몇 차례나 보고했다. 예를 들면 송나라가 받은 물건들은 노리개 같은 불필요한 물품이지만, 나라가 지출한 비용은 백성의 고혈이다, 고려 사절단이 가져온 물품들이 거리와 시장을 어지럽힌다는 등의 내용이다. 심지어는 고려의 교활한 상인들이 조공을 핑계로 자주 들어와 소란하게 만들었고, 중국에서도 간사한 무리들이 고려로 간다고 하면서 적국인 거란과 통한다는 등의 말까지 했다. 그만큼 교류를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렇게 무역활동에 적극적인 고려는 몽골과 전쟁을 벌이면서도 송나라와 무역을 계속했다. 상인들이 여러 차례 들어왔고, 원나라와도 무역을 했다. 일본과는 장보고를 비롯한 신라상인들이 활동하던 규슈 북부의 다자이후(太宰府)를 이용해 무역을 벌였다. 고려는 비단, 자기, 종이, 먹 등을 수출했고, 일본은 주로 유황, 구리, 귤, 해산물, 수은 등을 수출했다.
1976년에 신안에서 침몰한 원나라의 유물선이 발견됐다. 폭이 9m, 길이는 31m, 높이 10m에 달하는 큰 첨저선이었다. 안에는 청자 9,600여 점을 비롯해서 2만8000여 점의 화물들이 실려 있었다. 오수전과 원나라 동전을 비롯해 자단목, 물품표로 사용된 목간, 후추, 한약재 등 상상을 초월하는 다양한 종류의 물품들이 엄청나게 실려 있었다. 1323년에 영파항을 출항한 이 무역선은 동중국해를 건너 일본으로 가던 도중에 폭풍 등을 만나 피항하다가 서남 해안의 암초지대에 걸려 침몰된 것이다. 고려는 제주도인 탐라와는 물론이고 유구국(오키나와) 등과도 무역을 했다. 필시 동남아시아 지역과도 직접 교류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 무역 질서 활용 국가정책으로 성공
태안 해양유물전시관의 청자꾸러미들. 사진=태안 해양유물전시관,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태안 해양유물전시관의 청자꾸러미들. 사진=태안 해양유물전시관,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고려는 우리역사에서 가장 활발한 무역국가였다. 경제력이 강했고, 국제적인 사회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성과를 거두었을까?

첫째는 계승성이다. 국제무역이 활발했던 통일신라의 물류망, 인적네트워크, 기술력은 물론이고, 사회적 필요성과 인식, 국제적인 감각도 신라를 계승했을 것이다. 둘째는 국제적 환경의 변화와 관계다. 동아시아 세계가 분열되고, 정치가 안정되지 않으면 산업은 물론이고, 상업, 특히 무역은 침체기에 들어선다. 다행히 고려 전기에는 송나라가 중국의 분열을 종식하고 무역중시 정책을 추진했다. 송나라는 상업과 무역업이 극도로 발달했고, 조선술과 항해술은 세계최고 수준이었다. 서아시아에서는 아프리카 북부와 지중해의 무역망을 장악했던 아랍 세력들과 이슬람교도들이 한동안 셀주크 튀르크에게 억압받다가 아바스 왕조가 부흥에 성공해 인도의 일부 지역까지 장악했다. 한편 동남아시아에서는 크메르 왕국이 ‘앙코르와트’를 건설하며 무역왕국으로 번창하는 중이었다. 이처럼 지중해, 페르시아만, 인도양, 동남아시아, 동아지중해에 이르는 해양유라시아 세계에서는 해양네트워크를 이루면서 무역이 활발한 시대였다. 고려는 동아지중해 물류의 허브에 있으므로 이런 상황 속에서 무역을 벌이기에 적합했다. 더구나 수도인 개경은 우수한 항구도시였다.

셋째는 국가정책과 시대정신이다. 왕건은 경기만의 해양무역상 출신이었고, 지지세력들도 주로 범해양 호족세력들이었다. 그들은 군사력과 경제력의 중요성을 절감했고,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상업과 무역이 중요함을 인식했으므로 무역에 비중을 두는 정책을 추진했을 것이다. 또한 통일신라로부터 계승된 개방성, 산업과 무역의 중시, 현실적이고, 자주적인 태도 등의 시대정신도 고려의 무역활동과 경제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여기에는 현실적인 생활과 경제활동을 중시하는 고려불교의 영향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

넷째, 해양활동 능력의 발전과 해양력의 향상이다. 무역을 활발하게 할 수 있는 실질적인 토대는 내부적으로는 산업의 발달이지만, 실제로 필수적인 요소는 ‘조선술’ ‘항해술’ 등의 기술적인 능력이다. 고려는 조선술과 항해술이 뛰어나 등거리 외교를 기본으로 삼은 외교정책에 성공을 거뒀다. 또한 막강한 수군을 활용해서 여진해적을 토벌하고, 몽골과 전투를 벌였으며, 여몽연합군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윤명철, 《한국해양사》).

G12을 넘어 G7을 넘보는 우리에게 ‘근대화’와 ‘부국강병’이란 명분과 이념, 농업 대신에 실리와 산업, 그리고 무역을 선택한 결과였음을 보여준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