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노·나혜석·장욱진·김승영 등
시대상황에 저항하고 역류하며
'예술 작업자'로 남은 14명 조명
회화·조각·설치 등 80여점 전시
서울 신림동 서울대학교미술관에서 지난 7일 개막한 ‘작업(Art Work)’전은 이런 ‘머릿속 예술’에 반기를 든다. 작업은 작가의 태도에서 오지만 태도가 곧 예술은 아니라는 것. 태도가 예술이 되려면 ‘작업’이라는 번역 과정, 즉 물리적·신체적 구현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미술가에게 작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전시의 부제를 ‘팬데믹의 한가운데서 예술의 길을 묻다’로 정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번 전시는 시대 상황과 환경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꿋꿋이 열었거나 열고 있는 작가들의 이야기다. 이응노 장욱진 나혜석 김창열 안창홍 오귀원 구본주 김명숙 김승영 조성묵 최상철 홍순명 황재형 이진우 등 14명의 회화, 조각, 설치 등 80여 점을 내놓았다.
전시는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저항’, 시대의 조류·경향·유행에 쉽게 편승하지 않는 ‘역류(逆流)’, 고통과 고난을 견디며 혼돈 속에서 예술을 지키는 ‘고독’의 세 가지 섹션으로 구성됐다. 저항 섹션에는 고암 이응노(1904~1989)를 비롯해 나혜석 장욱진 조성묵 구본주를, 역류 섹션에는 황재형 안창홍 김창열 최상철 이진우를, 고독 섹션에는 오귀원 김명숙 홍순명 김승영을 배치했다. 장욱진은 일체의 싸움을 중단함으로써 폭력의 시대를 견뎌냈고, 이응노는 국가폭력의 전형인 정치적 음모와 추방의 희생자였지만 고난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는 대신 자신을 매질하고 가뒀던 세상에서 생명을 예찬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8)은 가부장제 사회와 맞서 포기하지 않고 싸웠다. 전통적인 여성관을 거부한 신여성으로서 가족의 외면, 사회의 비난, 경제적 궁핍과 소외를 견뎌야 했다. 구본주(1967~2003)는 시대의 부조리를 몸소 살아냄으로써 다듬어진 소시민의 삶에 주목했다. 황재형은 스물일곱 살 아내, 갓 태어난 아들과 함께 강원도 태백으로 가 광부가 됐다. 스스로 약자의 삶을 선택함으로써 탄광촌의 삶과 풍경을 여실하게 작품에 담아냈다. 이진우는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도 손작업의 가치를 지켜내는 작가다. 그는 캔버스에 펼쳐놓은 숯 위에 겹겹이 한지를 바르고 쇠솔로 문지르는 작업을 반복한다. 최상철은 붓, 팔레트, 이젤 같은 전통적 도구를 버리고 연필과 같은 단순한 도구와 중력만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토속적인 분위기가 짙은 장욱진의 ‘닭과 아이’ ‘황톳길’ ‘산수’ ‘길에서’를 비롯해 이응노의 ‘군상’ 목조각과 회화, 한지에 수묵으로 그린 문자추상 ‘구성’, 나혜석의 ‘자화상’과 ‘나부상’, 구본주의 조각, 조형을 치유로 삼고자 한 조성묵(1940~2016)의 ‘빵의 진화’ 연작 등이 눈길을 끈다. 커다란 청동 원판에 코 위의 얼굴만 내놓은 ‘눈칫밥 삼십년’과 양복 차림의 사내가 벽의 구석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는 ‘위기의식2’에선 소시민의 자화상 느낌이 진하게 배어난다. 탄광촌 비탈길에서 자전거를 타는 소녀를 그린 황재형의 ‘풍선껌Ⅱ’를 비롯한 탄광촌 풍경에선 정감과 비감이 교차한다. 붉은 심장을 날카로운 가시들이 휘감고 있는 안창홍의 조각 작품 ‘화가의 심장2’는 주류 미학의 거센 물살을 거스르면서 결연히 자신의 뿌리를 내렸던 작가의 상처와 인내를 말해주는 듯하다. 이진우의 숯과 한지 작업, 덧없는 순간을 포착한 오귀원의 조각 등도 주목할 만하다.
심상용 서울대미술관장은 “이들은 모두 인생의 한때 혹은 더 긴 시간 동안, 비주류와 타자로 분류되는 경험을 감내했고, 이런 소외를 견디면서 무언가를 성공적으로 해냈다”고 평가했다. “그림은 가장 정직한 것이다. 꾀를 부리면 부린 만큼 화면에 나타난다”고 한 장욱진의 생전 인터뷰가 긴 여운을 남기는 전시다. 오는 9월 20일까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