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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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이 10일 오후 11시께 별세했다. 향년 100세였다.

1920년 평남 강서에서 출생한 백 장군은 평양사범학교를 나왔고 1941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1943년에는 만주 지역의 항일 세력을 토벌하는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했다. 그는 해방 직후인 1945년 평양에 돌아갔고, 독립운동가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일하다 김일성이 권력을 잡자 그해 12월 월남했다. 1946년에는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부산 제5연대 중대장을 맡아 창군 원년 멤버가 됐다.

6·25전쟁에서의 활약

6·25전쟁은 백 장군의 인생에 전기를 마련해준 계기가 됐다. 6·25 전쟁 직전인 1950년 4월 백 장군은 대령으로 제1사단장이 돼 개성 지역을 담당했었다. 전쟁 발발 당시 고급 간부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는 여러 결정적인 전투에서 군을 지휘하며 1953년에는 육군참모총장의 자리까지 올랐다. 한국 최초 4성 장군이 됐다. 당시 나이는 불과 33세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계급장을 달아주면서 "옛날에는 임금만이 대장이 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공화국이라서 신하도 대장이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1950년 8월 다부동 전투는 백 장군이 승리로 이끈 대표적 전투 중 하나다. 대구 북방 25㎞에 있었던 다부동은 대구 방어의 전술적 요충지였다. 다부동 방어선이 무너지면 대구 함락은 물론 경남 지역까지 인민군의 남하는 시간 문제였다. 당시 전황은 패색이 짙었다. 당시 윌턴 워커 장군은 백 장군에게 "다부동에서 패해 전선이 후방으로 밀리면 한반도에서 미군이 철수한다"고 했을 정도였다. 백 장군은 국군이 밀리자 권총을 꺼내들고 병사들과 선봉에 서서 적진으로 돌격했다. 사단장이 앞장 선 것이었다. 백 장군은 "여기서 밀린다면 우리는 바다에 빠져야 한다"며 "우리가 밀리면 미군들도 철수한다. 앞장설 테니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고 했다.

평양 진군 역시 6·25전쟁 당시 백 장군의 업적 중 하나다. 그가 1사단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평양 진군의 선봉에 섰다. 당시는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의 전투력을 의심할 때였다. 백 장군은 영어로 직접 "1사단의 전투력과 사기가 매우 높아 제일 빨리 전진할 수 있다"며 "어렸을 적 평양에 살아 길을 잘 안다"고 미군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이때 미군을 설득해 대대급 전차브대를 배속박은 것도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미 육군 부대가 다른 나라 지휘관의 지휘를 받은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제외하면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가 이끄는 1사단은 결국 1950년 10월19일 평양을 점령했다. 미군보다 앞선 것이었다. 1사단은 김일성 집무실에 지휘소를 차렸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1사단장으로 한미 장병 1만5000여명을 지휘하며 고향(평남 강서)을 탈환했다"며 "평양에 입성했을 때가 내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 평생 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가 6·25전쟁에서 일궈낸 업적은 미군들로부터도 존경을 받는다. 역대 주한미군사령관들이 백 장군을 향해 '존경하는 백선엽 장군'이라는 경칭을 붙이는 게 전통이 됐다. 2013년엔 명예 미8군 사령관에 임명됐고, 2016년엔 한국인 최초로 미8군사령관 이·취임식에 초대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

백 장군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군 내부 남로당 숙청 분위기 속에서 박 전 대통령 구명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남로당 활동을 하던 박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사건에 연루됐는데 '군병력 제공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때 백 장군은 육군본부에서 정보국장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만주 시절 동료 20명과 함께 '박정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는 보증서까지 내고 박 전 대통령이 풀려나는 데 일조했다.

뿐만 아니라 백 장관은 박 전 대통령이 정보국에서 문관신분으로 북한반 상황실장으로 일할 수 있게 했다. 1953년에는 박 전 대통령의 장군 진급 때도 남로당 전력을 문제삼는 일각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사를 강행했다.

5.16 군사쿠데타 직후 중화민국 주재 대사로 있던 백 장군은 이후 프랑스 대사, 캐나다 대사 등을 역임했다. 1969년 12월에는 교통부장관으로 임명됐고, 충주비료 사장, 한국종합화학 사장 등을 거쳤다.

친일 논란

백 장군의 간도특설대 복무 경력은 '친일파' 꼬리표가 돼 그의 평생을 따라다녔다. 간도특설대는 당시 중국 공산당의 동북항일연군 및 팔로군뿐만 아니라 그 일대를 기반으로 한 독립운동가들을 토벌하는 역할을 했다.

일각에서는 백 장군이 배치된 1943년에는 이미 독립운동가들은 소련 연해주로 등지로 활동 무대를 옮겼기 때문에 그가 실제 독립운동가들을 맞상대할 일은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백 장군은 조선 독립군과는 교전해본 적 없지만, 중국 공산당 군 소속 조선인들과는 교전해본 적 있다고 증언했다. 1993년 일본에서 출간된 ‘간도특설대의 비밀’이라는 제목의 회고록에서 백 장군은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백 장군은 간도특설대 복무 경력 탓에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친일 논란으로 2010년 6·25전쟁 60주년을 기념해 '명예원수(元帥·5성 장군)'로 추대하는 방안이 검토됐다가 불발됐다.

백 장군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친일 전력을 이유로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다는 주장이 정치권에서 제기되기도 했지만 대전현충원을 관리하는 국가보훈처는 유족 요청 등의 특별한 사유가 없을 경우 현행법에 따라 백 장군을 대전현충원에 안장할 계획이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15일 오전 7시다.

임락근 기자 rkl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