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새빌 로' 양복점 거리 3분의 1 폐업…남은 곳도 수요 감소에 단축 영업
사회적 거리두기에 가봉 등 대면서비스 제약…재택근무로 수요 급감
한국인 테일러 김동현씨가 전하는 런던 맞춤형 양복 거리의 변화
코로나19 충격에 예외없다…'킹스맨' 양복점 거리도 불황 그림자
런던의 대표적인 명품업체와 고급 레스토랑이 즐비한 메이페어 한쪽에는 비스포크(bespoke·맞춤형) 양복점 거리인 새빌 로(Savile Row)가 자리잡고 있다.

영화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의 배경이 된 양복점 '헌츠맨 앤드 손'(Huntsman & Sons)을 비롯해 12∼13곳의 고급 양복점에는 수십년간 영국 왕실 등 세계적인 유명인사와 부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한 벌에 평균 600만∼700만원, 비싸면 1천만원이 넘을 정도로 고가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테일러(tailor·양복 재단사)가 3∼6개월 동안 정성을 들여 '한땀 한땀' 수제작하는 만큼 고객 수요는 꾸준히 이어졌다.

인근 오피스에서 근무하던 직장인들 역시 새빌 로 양복점의 셔츠나 타이 등으로 한껏 멋을 부리기도 했다.

영화 '킹스맨'의 팬이나, 패션에 관심있는 이들의 런던 여행 필수 방문코스가 되기도 한 새빌 로는 그러나 최근 화창한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을씨년스러운 풍경으로 변했다.

이미 3분의 1가량인 4∼5곳의 새빌 로 양복점이 문을 닫았고, 남아 있는 업체도 영업시간을 단축했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드레스를 만들고, '스페이스 오딧세이' 등 영화 의상에 참여해 기사 작위까지 받았던 하디 아미스(HARDY AMIES)의 양복점도 최근 폐업했다.

새빌 로 양복점 지하에서 가봉 작업을 하던 수많은 테일러들도 거리를 떠났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가장 직접적인 타격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부터 왔다.

글로벌 경기 침체로 고가 수제 양복 수요 자체가 줄어든데다, 여행 제한 등으로 해외 고객도 급감했다.

무엇보다 고객의 몸을 꼼꼼하게 측정해야 하는 맞춤형 양복 작업 특성상 사회적 거리두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

무겁고, 여러 겹의 옷을 겹치는 스타일의 전통 양복은 보다 가볍고 캐주얼한 옷을 원하는 최근 트렌드에도 맞지 않았다.

최근 새빌 로를 둘러싼 급격한 변화에 대해 이곳의 양복점 '캐드 앤드 더 댄디'(Cad & the Dandy)에서 일하는 한국인 테일러 김동현(31)씨를 통해 들어봤다.

김씨는 국내 대학에서 의상을 공부하다가 양복을 공부하기 위해 본고장인 런던의 런던예술대(UAL) 패션컬리지에서 비스포크 테일러링 학사를 취득했다.

이후 한국인 최초이자 유일한 테일러로 새빌 로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카타르 왕족 등 유명인사의 옷을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다음은 지난 1일 진행한 김씨와의 전화 인터뷰 일문일답.
코로나19 충격에 예외없다…'킹스맨' 양복점 거리도 불황 그림자
◇ 영국 여왕 드레스 메이커 하디 아미스도 문 닫아
-- 새빌 로 양복점 중 폐업한 곳이 있다는데.
▲ 코로나19 영향으로 전체 12∼13곳 중 3분의 1가량인 4∼5곳이 문을 닫았다.

여왕의 드레스 메이커로 유명한 하디 아미스의 가게를 포함해 체스터 베리(CHESTER BARRIE), 킬고어(KILGOUR), 조지프(JOSEPH)가 폐업했고, 모리스 세드윌(MAURICE SEDWELL), 노턴 앤드 손(NORTON AND SONS), 웰시 앤드 제프리스(WELSH AND JEFFERIES), 데이비스 앤드 손(DAVIES AND SONS), 덴멘 앤드 고더드(DENMAN AND GODDARD) 등은 잠정 휴업 중이다.

--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 내가 일하는 캐드 앤드 더 댄디를 비롯해 찰스 왕세자가 주로 이용하는 앤더슨 앤드 셰퍼드(Anderson & Sheppard), 윌리엄 왕세손과 해리 왕자가 옷을 맞췄던 깁스 앤드 호크스(Gieves & Hawkes) 등은 문을 열었지만 예전에 비해 제한적으로 영업을 하고 있다.

아울러 예전에는 그냥 양복점에 들어와 둘러보거나 상담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사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해외 주문도 줄었다.

코로나19 이전에는 트렁크쇼(Trunk show)라고, 원단이나 가봉 책자를 여행용 트렁크에 실어서 해외 고객을 직접 찾아간 뒤 주문을 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마저도 원활하지 못하다.

예전에는 중국이나 한국 등에도 1년에 두 세차례 트렁크쇼를 갔는데 지금은 전무하다.

-- 코로나19로 양복 제작에 어떤 타격을 입었나.

▲ 맞춤형 양복 제작에 보통 3∼6개월이 소요된다.

옷을 얼기설기 손으로 꿰매서 입혀보는 것을 가봉이라고 한다.

양복 한 벌 제작을 위해서는 두 세 차례 양복점을 방문해 가봉을 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코로나19 때문에 거리두기를 시행하고 있어 가봉 작업 등 대면 서비스가 제약되고 있다.

◇ 맞춤형 양복 수요 10분의 1로 줄어…황량해진 새빌 로
-- 수요가 얼마나 줄었나.

▲ 캐드 앤드 더 댄디의 경우 10분의 1로 줄었다.

코로나19 이후 주변 오피스 근무자들이 대부분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근처에 사람이 없다.

이들 오피스 근무자들은 셔츠 등 이런 것들도 많이 주문했는데 재택을 한 이후로 그런 주문 자체가 없다.

여행이 제약되다 보니 외국인 수요도 급감했다.

유동 인구가 없으니까 새빌 로의 분위기 자체가 처져 있다.

오가는 사람이 없으니 근처에 샌드위치 가게 등도 문을 닫았다.

거리 자체가 황량하다.
코로나19 충격에 예외없다…'킹스맨' 양복점 거리도 불황 그림자
-- 테일러들도 일자리를 잃은 경우가 많나.

▲ 폐업한 곳은 당연하고, 문을 연 곳도 인원을 많이 줄였다.

캐드 앤드 더 댄디의 경우 저 포함 테일러가 10명가량 있었는데 지금 서너명이 남았다.

영업 파트에서도 5∼6명이 그만두면서 2명이 세일즈를 담당하고 있다.

남아있는 사람들도 수입이 줄었다.

예전 대비 80%를 받고 있다.

-- 줄어든 수요를 만회하기 위해 가격 인하 등의 변화는 없나.

▲ 가격을 낮추기보다는 이전에 하지 않던 마케팅을 시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코로나19에 대응해 양복 원단으로 마스크를 제작해 판매하고 있다.

개당 30 파운드(약 4만5천원) 정도 하는데 수십개씩 팔리다보니 수입에 도움이 되고 있다.

◇ 전통적 양복에 변화 시점…경량화·단순화 요구 커져
-- 코로나19가 폐업 등 새빌 로 변화의 주요인인가.

▲ 코로나19가 경영상의 어려움을 불러온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새빌 로가 코로나19 때문에 무너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코로나19 이전에 이미 새빌 로의 어려움을 예상할 수 있는 여러 변화가 시작됐다.

영국의 양복은 전통적으로 단단하고 구조적(constructive)이다.

일종의 갑옷과 같다.

셔츠 위에 조끼, 다시 재킷을 입는데다 원단 자체가 무겁다.

뭔가를 쌓아올려서 인체의 조형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미 사람들은 조금 더 편한 옷으로 움직이고 있다.

경량화·단순화의 시대다.

여기에 코로나19로 출퇴근 대신 재택근무가 확산됐다.

출퇴근 할 일이 없으니 전통적 양복보다는 가볍고 캐주얼한 옷, 정장 모양을 갖췄더라도 쉽게 벗고 입을 수 있는 옷을 원하고 있다.

예전 영국에서는 재킷을 입지 않으면 출입할 수 없는 식당, 타이를 하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하는 경마장이 많았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있다.

전통 양복은 앞으로는 도자기처럼 장인들이 하는 것, 일종의 예술작품화할 것으로 보인다.

시대 감각에 맞춰 새로운 옷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새빌 로에서 일하는 테일러들의 숙제이자 사명이다.

이미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보수적 업체들은 이전에는 사파리 자켓 같은 캐주얼한 옷을 아예 만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경량화한 수트를 만드는 곳도 늘어나고 있다.

영국 자체가 변화가 거의 없는 곳이다.

하지만 새빌 로에서도 조금씩 변화가 나타나고 있고, 코로나19가 이를 더 가속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 앞으로의 계획은.
▲ 일단 캐드 앤드 더 댄디는 일거리가 계속 있다.

기존에 이곳에서 옷을 맞춘 해외 왕족 등 고객이 계속 주문을 하고 있다.

다만 코로나19 여파가 지속돼 일이 끊긴다면 변화에 맞춰야 하지 않나 싶다.

나만의 비즈니스, 디자인을 추구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코로나19 충격에 예외없다…'킹스맨' 양복점 거리도 불황 그림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