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자하문로 웅갤러리와 본갤러리의 ‘배운성 전-1901~1978’에 전시된 ‘빨래하는 여인들’.  웅갤러리 제공
서울 자하문로 웅갤러리와 본갤러리의 ‘배운성 전-1901~1978’에 전시된 ‘빨래하는 여인들’. 웅갤러리 제공
한국인 최초 서양화가 고희동이 최초의 미술유학생으로 일본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한 것은 1909년. 이후 미술학도들의 일본행이 이어졌다. 김환기 장욱진 이중섭 등 근현대 대표 화가 대부분이 일본을 통해 서양 미술을 받아들였다. 배운성(1901~1978)은 달랐다. 일본을 거쳐 1922년 독일로 유학을 떠난 최초의 유럽 유학파이자 1940년 귀국하기까지 베를린과 파리를 무대로 명성을 드날린 첫 한국 미술가였다.

서울 자하문로 웅갤러리와 본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배운성 展-1901~1978:근대를 열다’는 그의 작품을 직접 만날 수 있는 드문 기회다.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판화 1점과 드로잉 1점을 포함한 48점이 처음 공개된 후 19년 만에 열리는 전시다.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잃은 배운성은 서울 낙원동의 큰 부자였던 백인기 집에서 일을 거들며 공부했다. 백인기의 도움으로 중동중학교를 마친 그는 또래였던 백인기의 아들 백명곤과 함께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간 뒤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경제학을 공부할 계획이었으나 베를린으로 가기 전 들렀던 마르세유의 박물관에서 유럽 명화들을 처음 접하고 진로를 바꿨다.
韓 최초 유럽 진출 화가 배운성을 만나다
1930년 베를린국립미술학교를 졸업한 그는 동양적 소재의 인물, 풍경, 판화 등 다양한 작품으로 유럽 미술계의 호평을 얻었다. 1927년 파리의 살롱 도톤 입상, 1933년 폴란드 바르샤바 국제미술전 1등, 프라하 국제목판화전 입상 등으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베를린, 프라하 등에서 개인전도 열었다. 1937년 파리에 정착한 뒤에는 살롱 드 메, 르 살롱, 살롱 도톤 등에 잇달아 참여했고, 세계적인 샤르팡티에 화랑에서 개인전을 여는 등 전성기를 구가했다.
배운성, 화가의 아내, 1938, 캔버스에 유채, 60 x 73cm. 웅갤러리 제공
배운성, 화가의 아내, 1938, 캔버스에 유채, 60 x 73cm. 웅갤러리 제공
하지만 1940년 독일군이 파리를 침공하자 그는 급거 귀국했다. 아틀리에가 폐쇄되고 몸만 빠져나오느라 162점의 작품은 그대로 둔 채였다. 해방 후 홍익대 미술과 초대 학장,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했던 배운성은 6·25전쟁 중 월북했다. 귀국 후 재혼한 부인 이정수가 이화여대 출신인 좌익 인사였다.

북한에서 조선미술가동맹 소속 작가로 활동했으나 한국에서 그는 잊힌 존재가 됐다. 유럽 시절 작품은 남아 있지도 않고, 귀국 후 작품은 월북작가인 탓에 온전히 보존되지 못했다. 1988년 월북 작가의 작품들이 해금된 뒤에도 그의 작품을 보기 어려웠던 이유다.

그런 배운성을 다시 역사의 무대로 불러낸 이가 전창곤 대전프랑스문화원장이다. 1984년부터 파리에서 유학했던 전 원장은 1998~1999년께 배운성의 작품이 무더기로 남아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6개월여의 줄다리기 끝에 48점을 두 차례에 걸쳐 사들였다. 전 원장은 “2000년 말 귀국해 이듬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배운성 작품을 처음 선보였는데 그때는 배운성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상태여서 백지 위의 전시였다”고 회고했다.

적잖은 연구 성과가 쌓인 가운데 열리는 이번 전시는 당시와 달리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전 원장은 “배운성은 유럽에서 제대로 교육받고 활동한 첫 한국 화가”라며 “서양적 기법과 동양적 기법을 아우른 완숙한 작품으로 주목받았다”고 설명했다.

배운성은 이국땅에서 한국의 풍습과 민속, 풍경, 한국인을 많이 그렸다. 그네뛰기, 널뛰기, 팽이 돌리기 등 아이들의 놀이와 빨래터 풍경, 무희와 고수, 두루마기 차림의 남자 등이 그림에 담겨 있다. 독일인 부인을 그린 ‘화가의 아내’ ‘꽃이 있는 정물’ 등 이국적인 작품도 만날 수 있다.
배운성이 자신을 도와준 경성 부자 백인기 집안 식구들을 그린  '가족도'. 1930~35.
배운성이 자신을 도와준 경성 부자 백인기 집안 식구들을 그린 '가족도'. 1930~35.
그가 1930~1935년 무렵 그린 ‘가족도’는 자신을 도와준 백인기 가족의 초상화다. 한옥을 배경으로 대가족이 등장하는 이 작품은 당대 주거와 복식 등을 생생하게 보여줘 등록문화재 제534호로 지정돼 있다. 그림의 맨 왼쪽에 흰 두루마기를 입고 선 남자가 배운성이다.

이번 전시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점은 한국전통문화대, 공주대 연구팀의 과학적 작품 분석 결과다. 자외선, 가시선, 적외선, 초분광, 테라헤르츠, X선 등으로 작품을 분석한 결과 통통한 아이의 옆얼굴을 그린 ‘애기 초상’의 경우 그 아래에 정면을 응시하는 다른 그림이 명확히 확인됐다. ‘두 여인과 아이’에서는 오른쪽 여인의 자세를 수정한 흔적과 함께 통통하고 입이 뭉툭한 개가 원래는 날씬하고 입이 길쭉했음이 드러났다. 연구팀은 이들 작품 외에 20여 점의 배운성 작품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전시는 오는 29일까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