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태의 데스크 칼럼] 제약史 큰 족적 남긴 임성기 회장
“동대문에서 임성기약국 하실 때 저는 옆 골목에서 행상을 하며 물건을 팔았어요. 한 달에 3만9700원씩 적금을 들었는데 그 통장을 맡아줬어요. 매일 번 돈을 맡기려고 약국에 들르면 ‘이쁜이 왔구나’ 하며 드링크를 건네주셨죠.”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의 부고를 알리는 한 기사에 달린 댓글입니다. 사연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임 회장은 당시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도 마음을 많이 썼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됩니다.

1973년 한미약품을 창업한 임 회장은 척박했던 한국 제약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꾼 혁신 기업가 가운데 한 분입니다.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자가 한국 제약산업의 터를 닦았다면, 임 회장은 국내 제약산업의 물줄기를 바꿔놨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글로벌 제약사의 약을 가져다 팔거나 제네릭(복제약)에 의존하던 국내 제약회사들이 신약 개발에 도전하는 물꼬를 텄기 때문입니다.

혁신 일깨운 기업가

한미약품이 본격적으로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2015년입니다. 그해에만 모두 6건의 초대형 신약 기술수출을 성사시켰습니다. 베링거인겔하임 일라이릴리 사노피 등 글로벌 초대형 제약사가 한미약품의 신약 후보물질을 1조원 안팎의 거액에 가져갔습니다. 해외에서 한국 제약·바이오산업을 주목하기 시작한 계기가 됐습니다. 물건이 될 만한 신약 후보물질을 국내에서 찾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입니다. 바이오기업들의 기술수출에 마중물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죠.

임 회장을 추억하는 지인들이 떠올리는 단어 중 하나는 ‘혁신’입니다. 1967년 임성기약국 문을 열었을 때부터 그랬다고 합니다. 그는 약사로는 처음으로 명찰을 단 하얀 가운을 입고 손님을 맞았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을 처방하겠다는 의지에서였습니다. 뭔가 달랐던 이 약국은 금세 문전성시를 이뤘습니다.

개량신약 시대를 연 것도 임 회장이었습니다. 새로운 약을 직접 만들겠다는 포부로 회사를 세웠지만 글로벌 제약사처럼 신약 연구개발(R&D)은 꿈도 꾸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자본도, 인력도 부족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다들 제네릭에 매달릴 때 그는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뭔가 다르게 만들면 통하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개량신약입니다. 약물 성분은 외국의 오리지널약 성분을 그대로 쓰면서 제형을 바꾼 것입니다. 가령 정맥주사제를 피부 주사제로 바꾸거나 약 먹는 횟수를 줄여주는 식으로 개선했습니다.

"신약개발은 내 목숨과 같다"

이런 노력은 약물 지속기간을 늘려주는 랩스커버리 기술로 이어졌습니다. 기술수출 대박을 터뜨리는 데 토대가 된 약물전달 기술입니다.

그에게 붙는 또 다른 수식어는 ‘젠틀맨’입니다. 나이 어린 직원에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다고 합니다. 업무 과실을 한 임직원에게 대놓고 화를 내거나 욕설을 내뱉는 일도 없었다고 합니다. 아랫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오너 경영인으로도 유명했습니다. 나이 어린 직원이라도 일리 있다고 판단되는 말이면 꼭 메모해두고 챙겨 봤다고 합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중소 제약사에 그쳤던 한미약품이 한국을 대표하는 신약 개발사로 성장하게 된 게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입니다.

임 회장은 숱한 역경과 좌절, 성공을 뒤로 한 채 영면에 들었습니다. “신약 개발은 나의 목숨과도 같다”던 그의 말은 한국 제약·바이오 기업이 갈 길을 알려주는 메시지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py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