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공룡능선의 비극
닉네임이 ‘필건’인 친구가 최근 단체 메신저 방에 산행 일정을 올렸다. 설악산 공룡능선에 같이 가자는 내용이었다. 6년 전 공룡능선 무박 종주를 했던 즐거운 추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회사 일로 지난 6년 동안 해외 출장을 가면서 틈틈이 현지 관광지나 맛집을 들르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 등산 코스와는 느낌이 달랐기에 흔쾌히 같이 가자고 했다. 이렇게 필건을 등반대장으로 달마봉, 쎄이, 갯마을, 안나, 태수, 배짱이 일곱 명이 무박 산행 일정을 시작했다.

새벽 3시께 헤드랜턴을 켜고 산을 오르는 일정이라 랜턴 불빛 이외에는 칠흑 같은 어둠만 있었다. 산행 중 설악폭포의 물소리도 청각으로만 듣기 아까워 랜턴으로 주위를 비춰보았지만, 역시 폭포의 형체는 알아보기 어려웠다. 비록 비구름으로 인해 일출은 못 보았지만, 발아래 구름으로 인해 산 아래 경치가 구름뿐이었지만, 정상에서의 희열을 느끼고는 감격에 겨워하기까지 했다. 이내 대청봉 정상의 바람이 구름을 밀어내고 설악산 전체 비경을 한눈에 들어오게 하기도 했다. 얼른 사진을 찍었다. 지금 안 찍으면 이런 광경은 잊어버릴지도 모르는데 실제 기억을 못 하면 너무 아까울 것 같다.

대청봉에서 희운각까지 내려오는 코스부터는 종아리가 아파왔다. 산행의 중반부이자 하이라이트 코스인 공룡능선을 오르내리면서 다리는 서서히 풀려가고 있었다. 마등령에서 비선대로 내려오는 코스는 잡돌로 이뤄져 있어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종아리 근육 통증이 점점 심해지는, 그야말로 고행길이었다.

정강이 부위엔 상처가 난 모양인데 찰과상이 있는 듯했다. 이정표에는 비선대까지 내리막으로 800m 남았다고 쓰여 있었다. 왜 이리 긴지 괜히 이정표 거리가 잘못됐을 거라고 투덜거렸다. 한 발 한 발이 천근만근이라는 표현이 이런 상황을 표현하는 말이리라.

기억을 더듬어 보면 6년 전 같은 산행에서도 같은 고통을 느꼈던 것 같다. 그때도 마등령 하산 길의 돌부리와 돌계단 하나하나를 이렇게 원수같이 느꼈으리라.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다. 힘들었던 순간이 모여 과거의 행복한 기억으로 재구성됐을 텐데, 6년 전 산행을 즐거운 추억으로만 기억했던 것이다. 이번 산행의 고통도 시간이 지나면 친구들과의 즐거운 추억, 사진 속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 잊힐지도 모른다.

우리는 매일 새로운 비즈니스 환경에 부딪혀 어렵게 사투를 벌이며 적응해가고 있다. 다가올 환경에는 누구도 확신이 없다. 어려운 가운데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로 맞선다면 비록 지금이 비극처럼 느껴질지라도, 멀리서 보면 희극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마등령에서 하산하면서 돌계단의 어려움과 실제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던 이정표의 표시가 내 기억 속에 비극으로 각인된 지 하루도 안 됐다. 정강이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필건이 단체 대화방에 제안한다. “다음에는 지리산 종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