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레바논' 잉태한 사이크스-피코 협정, 대폭발로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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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뒤 영·프 중동 비밀 협상으로 '나눠먹기'
프랑스, 기독교계 많은 지역에 이슬람계 섞어 레바논 급조 건국 4일(현지시간) 레바논 베이루트항구에서 일어난 대폭발 사건으로 레바논의 난맥상과 같은 정국 혼란과 세력간 갈등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레바논은 '모자이크 국가'라는 별칭이 붙었을 만큼 종족, 종교적 구성이 매우 다양하다.
혈통으로는 아랍계(95%)와 아르메니안계(4%)가 주축이고 기독교와 이슬람 17개 종파가 공식으로 인정된다.
기독교는 마론파, 그리스 정교, 아르메니안 정교 등 12개 분파로 나뉘고 이슬람은 시아, 수니, 드루즈, 알라위 등 5개 분파가 있다.
이 때문에 권력안배주의(Confessionalism)로 불리는 레바논의 통치 체계는 종파로 구분되는 정파간의 복잡다단한 연정으로 지탱된다.
128석의 의회는 기독교와 이슬람계 정파가 절반씩 나눠 갖는다.
이런 다양성은 평화로운 시기엔 교류와 유연성이라는 장점을 발휘하지만 외세의 간섭이 많고 폭력이 빈번한 중동에서는 오히려 최대 약점이 됐다.
1975∼1990년 기독교와 이슬람계가 벌인 장기 내전, 2006년 이스라엘과 친이란 헤즈볼라의 교전은 모두 주변국의 정세에 휘말린 레바논의 비극적 단면이다.
레바논이 중동에서 유일한 기독교와 이슬람이 절반씩 섞인 혼합 국가가 된 것은 1916년 5월 영국과 프랑스가 비밀리에 맺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이 그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협정은 영국의 외교관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 외교관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의 이름을 땄다.
둘은 이곳을 영토로 두었던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연합군이 주축인 영국과 프랑스는 비밀리에 이 지역을 '나눠 먹기'하는 협상을 벌였다.
협상 결과 영국(B 구역)은 지중해와 요르단강 사이 해안 지역 일부와 지금의 이라크, 요르단을 가져가고, 프랑스(A 구역)는 이라크 북부 일부와 시리아, 레바논을 차지하기로 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종파 갈등이나 부족성이 강한 아랍 무슬림의 역사·문화·종교적 요인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영국과 프랑스의 이해관계에 따라 말 그대로 국경이 '쭉 그어진' 탓이다.
수니파가 살던 알레포가 시아파의 분파 알라위파가 지배하는 시리아와 묶였고, 수니파 중심 도시 모술도 시아파 대도시 바그다드와 한 나라가 되는 식이었다.
비밀 협상이었던 탓에 정작 당사자인 아랍 세력은 배제됐다.
당시 아라비아반도와 레반트(현재의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지역)를 아우르는 통일된 아랍 민족국가 설립을 약속받고 영국을 도와 오스만튀르크 제국과 싸운 메카의 태수 후세인 빈 알리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철저히 배신당했다.
후세인이 영국 고등판무관 헨리 맥마흔과 서한으로 아랍 민족국가 설립을 논의한 시기와 사이크스-피코 협정이 진행된 때가 겹친다는 점은 영국이 중동에서 벌인 '이중 플레이'의 결정적 장면이다.
이런 배신의 역사엔 1910년 중반 발견된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석유를 차지하려는 영국의 노림수가 크게 작용했다.
1917년 이 비밀 협정의 내용이 구소련의 볼셰비키에 의해 공개되자 "영국은 당황했고 아랍은 경악했다"라고 했을 정도로 내용과 형식에 문제가 많았다.
현재 중동의 국경이 산맥이나 강을 기준으로 구불구불하지 않고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반듯한 것은 제국 식민주의의 산물인 사이크스-피코 비밀 협정의 일방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프랑스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A 구역 가운데 역사적으로 기독교계가 많은 지역에 자치권을 부여하더니 1920년 레바논을 건국했다.
기독교계 자치지역이 국가 수립에는 좁다는 판단에 이슬람계 주민이 사는 트리폴리, 시돈, 티레 등을 레바논의 영토에 병합하는 급조된 국가였다.
레바논은 1943년 프랑스에서 공식으로 독립했지만 지금도 프랑스어를 제2공용어로 사용할 만큼 프랑스의 잔재가 여전하다.
프랑스도 과거 식민지였던 레바논에 대한 지원을 꺼리지 않는다.
/연합뉴스
프랑스, 기독교계 많은 지역에 이슬람계 섞어 레바논 급조 건국 4일(현지시간) 레바논 베이루트항구에서 일어난 대폭발 사건으로 레바논의 난맥상과 같은 정국 혼란과 세력간 갈등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레바논은 '모자이크 국가'라는 별칭이 붙었을 만큼 종족, 종교적 구성이 매우 다양하다.
혈통으로는 아랍계(95%)와 아르메니안계(4%)가 주축이고 기독교와 이슬람 17개 종파가 공식으로 인정된다.
기독교는 마론파, 그리스 정교, 아르메니안 정교 등 12개 분파로 나뉘고 이슬람은 시아, 수니, 드루즈, 알라위 등 5개 분파가 있다.
이 때문에 권력안배주의(Confessionalism)로 불리는 레바논의 통치 체계는 종파로 구분되는 정파간의 복잡다단한 연정으로 지탱된다.
128석의 의회는 기독교와 이슬람계 정파가 절반씩 나눠 갖는다.
이런 다양성은 평화로운 시기엔 교류와 유연성이라는 장점을 발휘하지만 외세의 간섭이 많고 폭력이 빈번한 중동에서는 오히려 최대 약점이 됐다.
1975∼1990년 기독교와 이슬람계가 벌인 장기 내전, 2006년 이스라엘과 친이란 헤즈볼라의 교전은 모두 주변국의 정세에 휘말린 레바논의 비극적 단면이다.
레바논이 중동에서 유일한 기독교와 이슬람이 절반씩 섞인 혼합 국가가 된 것은 1916년 5월 영국과 프랑스가 비밀리에 맺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이 그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협정은 영국의 외교관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 외교관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의 이름을 땄다.
둘은 이곳을 영토로 두었던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연합군이 주축인 영국과 프랑스는 비밀리에 이 지역을 '나눠 먹기'하는 협상을 벌였다.
협상 결과 영국(B 구역)은 지중해와 요르단강 사이 해안 지역 일부와 지금의 이라크, 요르단을 가져가고, 프랑스(A 구역)는 이라크 북부 일부와 시리아, 레바논을 차지하기로 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종파 갈등이나 부족성이 강한 아랍 무슬림의 역사·문화·종교적 요인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영국과 프랑스의 이해관계에 따라 말 그대로 국경이 '쭉 그어진' 탓이다.
수니파가 살던 알레포가 시아파의 분파 알라위파가 지배하는 시리아와 묶였고, 수니파 중심 도시 모술도 시아파 대도시 바그다드와 한 나라가 되는 식이었다.
비밀 협상이었던 탓에 정작 당사자인 아랍 세력은 배제됐다.
당시 아라비아반도와 레반트(현재의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지역)를 아우르는 통일된 아랍 민족국가 설립을 약속받고 영국을 도와 오스만튀르크 제국과 싸운 메카의 태수 후세인 빈 알리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철저히 배신당했다.
후세인이 영국 고등판무관 헨리 맥마흔과 서한으로 아랍 민족국가 설립을 논의한 시기와 사이크스-피코 협정이 진행된 때가 겹친다는 점은 영국이 중동에서 벌인 '이중 플레이'의 결정적 장면이다.
이런 배신의 역사엔 1910년 중반 발견된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석유를 차지하려는 영국의 노림수가 크게 작용했다.
1917년 이 비밀 협정의 내용이 구소련의 볼셰비키에 의해 공개되자 "영국은 당황했고 아랍은 경악했다"라고 했을 정도로 내용과 형식에 문제가 많았다.
현재 중동의 국경이 산맥이나 강을 기준으로 구불구불하지 않고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반듯한 것은 제국 식민주의의 산물인 사이크스-피코 비밀 협정의 일방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프랑스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A 구역 가운데 역사적으로 기독교계가 많은 지역에 자치권을 부여하더니 1920년 레바논을 건국했다.
기독교계 자치지역이 국가 수립에는 좁다는 판단에 이슬람계 주민이 사는 트리폴리, 시돈, 티레 등을 레바논의 영토에 병합하는 급조된 국가였다.
레바논은 1943년 프랑스에서 공식으로 독립했지만 지금도 프랑스어를 제2공용어로 사용할 만큼 프랑스의 잔재가 여전하다.
프랑스도 과거 식민지였던 레바논에 대한 지원을 꺼리지 않는다.
/연합뉴스